70~80년대 풍경 그대로…'태양의 후예'도 다녀가
경기 양평 구둔역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지
삐걱대는 문·나무로 된 천장
대합실 곳곳 아련한 정취 가득
강원 태백 철암역
다방·선술집·치킨집…탄광마을 느낌 여전
인근엔 드라마 세트장
충남 논산 연산역
하루 10회 서지만 타는 사람 거의 없어
시간 멈춘 듯한 풍경
전북 군산 임피역
서양·일본 양식 건축 1900년대 모습 간직
철길마을도 관광명소
[ 김명상 기자 ]
기차가 지나던 옛 철길과 역에는 아련한 향수가 묻어 있다.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한 채 조금은 쓸쓸해진 분위기가 아날로그적 감성을 더욱 자극한다. 해 질 무렵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철길을 거닐며 과거를 추억해보면 어떨까.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천천히 걸으면서 느림의 미학도 느껴보자. 한국관광공사는 2016년 12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12월 간이역 여행’을 주제로 4곳을 선정, 발표했다. 쓸쓸한 초겨울에 만나는 간이역과 철길은 바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작지만 큰 휴식을 선물할 것이다. 김명상 기자 terry@hankyung.com
경기 양평 구둔역- 녹슨 철길에 내려앉은 사랑
경기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에 있는 구둔마을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한양으로 넘어서는 언덕길에 진지 아홉 개가 있어 구둔(九屯)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의 구둔역에는 80년 가까운 세월이 묻어 있다. 퇴역한 노병처럼 주름 깊은 은행나무 한 그루, 엔진의 열기가 식은 기관차와 객차 한 량, 역 앞을 서성이는 개 한 마리가 구둔역의 친구다. 구둔역은 간이역의 흔적과 폐역이라는 명패를 달고 벌판에 섰다. 1940년 문을 연 이곳은 청량리~원주 간 중앙선 복선화 사업으로 종전 노선이 변경되면서 2012년 폐역의 절차를 밟았다. 구둔역의 빛바랜 역사와 광장, 철로, 승강장은 등록문화재 296호로 지정됐다.
최근에는 추억의 간이역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첫사랑이 담긴 촬영지로 널리 알려졌다. 예능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에서 김국진과 강수지가 철길 데이트 코스로 선택한 곳도 구둔역이다. 삐걱거리는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 만나는 승강장과 철길은 근대 문화 그 자체다. 천장이 나무로 된 대기실, 사무실, 숙직실 등이 남았으며, 대합실에는 열차가 오가던 시절의 시간표와 매표소 유리창 등이 빛바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승강장으로 나가면 노목에는 나뭇잎 대신 소원지가 매달려 있다. 청량리행을 알리는 이정표도 철로 변을 지킨다. 멈춰 선 기관차와 객차 역시 철로 한편에서 겨울 역의 아련한 정취를 더한다.
구둔역은 올해 말부터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역사 옆에는 빨간 벽돌과 나무 한 그루가 어우러진 ‘고백의 정원’이 생긴다. 사무실은 카페로 꾸미고, 고구마피자와 빵 만들기 체험장도 문을 연다. 승강장 옆에는 군불을 쬐며 추위를 다스릴 모닥불 터를 마련할 계획이다.
고즈넉한 구둔역에서 벗어나 용문 방향으로 가면 용문사, 친환경농업박물관 등이 자리한 용문산관광지가 나온다. 계곡을 따라 천년 고찰 용문사까지 이어지는 산책 코스가 유명해서 주말에는 등산객으로 붐빈다. 용문사 경내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는 수령과 높이가 국내 최대급이다. 다채로운 먹거리도 양평으로 가는 발걸음을 들뜨게 만든다. 용문산 초입에는 들깨, 곤드레나물 등으로 힐링 푸드를 내는 식당이 여럿 있다. 곤드레나물밥 한 그릇이면 추운 몸을 녹이는 데 부족함이 없다.
양평 여행을 할 때 한적한 숲 속 산책을 원한다면 백운봉 자락에 있는 쉬자파크로 가보자. 휴식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관찰데크와 잔디광장, 초가원, 솔쉼터 등이 있다. 산책로 중간에서 만나는 의자는 예술미가 돋보인다. 허브정원과 다양한 조각상이 볼 만한 남한강 변의 들꽃수목원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야간 개장하므로 늦게 방문해도 좋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숲 속의 하룻밤을 체험해도 좋다. 중미산자연휴양림은 토성과 목성 등 행성을 테마로 한 숙소를 새롭게 개장했다. 휴양림 옆에 중미산천문대가 있어서 밤하늘의 별자리와 추억을 나눌 수 있다. 양평 여행의 마무리 장소는 두물머리가 제격. 두물머리는 연인들의 야외 데이트 성지로 알려져 있다. 주말이면 강변 조명 아래 은은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양평군청 관광진흥과 (031)770-2490
강원 태백 철암역-탄광 도시의 전성기를 만난다
강원 태백 철암은 국내를 대표하는 탄광 마을이다. 정부가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펴기 전까지 태백에는 50여개 광산이 있었다. 철암은 한때 인구가 5만명에 이를 정도였다. 당시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는 곳이 철암역이다. 석탄으로 번성하던 시절을 웅변하듯 4층 건물이 우뚝 서 있다. 철암역은 1940년 묵호~철암 구간 철도가 개통하면서 영업을 시작했다. 지금의 역사는 1985년에 지은 것이다.
철암역 역사 옆에 자리한 선탄장은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안성기와 박중훈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주먹다짐을 벌인 곳이 여기다. 철암역두선탄장은 국내 최초 무연탄 선탄 시설이자 근대산업사의 상징적인 시설로 평가받아 등록문화재 21호로 지정됐다.
선탄장 건너편에 자리한 마을 풍경도 독특하다. 1970년대나 1980년대에서 멈춘 듯, 2~3층 건물이 당시 모습 그대로다. 호남슈퍼, 한양다방, 젊음의 양지, 산울림 등 여러 선술집과 식당, 치킨집 간판이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은 철암탄광역사촌으로 재단장해 박물관이나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남쪽 신설교에서는 철암천 변을 따라 선 ‘까치발 건물’ 11동을 볼 수 있다. 까치발 건물은 부족한 주거 공간을 확보하고자 하천 바닥에 목재나 철재로 지지대를 만들어 넓힌 집으로 탄광촌의 상징물과 같다.
태백은 겨울 가족 여행지로도 좋다. 국내 석탄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태백석탄박물관, 고생대 삼엽충과 공룡 화석을 전시하는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용연동굴,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연못, 드라마 〈태양의 후예〉 세트장과 함께 돌아볼 수 있다. 드라마 속 우르크 태백부대를 메디큐브와 막사 등으로 조성해 복원했다. 태백부대 옆에는 지진으로 무너진 우르크발전소가 있는데, 극 중 송중기가 송혜교의 신발 끈을 묶어준 곳이다. 태백시청 관광문화과 (033)550-2081
충남 논산 연산역-100년 넘은 급수탑에 녹아 있는 과거
충남 논산시에 있는 연산역은 대전과 논산 사이에 있는 간이역이다. 상·하행을 더해 기차가 하루에 10회 정차한다. 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덕분에 연산역의 시간은 자연의 속도에 맞춰 느긋하게 흐른다.
연산역의 재미는 두 가지다. 등록문화재 48호로 지정된 급수탑을 구경하고, 철도 문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연산역 급수탑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됐다. 1911년 호남선 대전~강경 구간이 개통하면서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급수탑을 세웠으니 100년이 지났다. 원기둥 모양으로 전체 높이는 16.2m, 한 번에 30t을 채울 수 있다.
보고 있으면 목마른 증기기관차가 연산역으로 달려와 수증기를 내뿜으며 숨을 고를 것만 같다. 다른 지역 급수탑은 보통 콘크리트로 만들지만 연산역 급수탑은 화강석을 쌓고 철제 물탱크를 얹었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48호로 지정됐다.
연산역은 철도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단체나 개인이 미리 신청하면 안전 복장에 헬멧을 착용하고 체험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내용은 급수탑 견학, 전호(깃발 신호) 체험, 기관사 체험, 선로 전환기 조작, 철도 안전 교육, 통일호 방송, 승차권 발권 등으로 다양하다.
역 안에는 ‘연산역 타임 엽서’를 위한 우체통이 있다. 오늘 발송 우편함, 1년 후 발송 우편함, 3년 후 발송 우편함이다. 엽서를 쓴 사실도 잊어버린 어느 날 1년 전이나 3년 전에 보낸 엽서를 받는 것은 특별한 추억이 될 것이다.
연산역에서 가까운 곳에서 다른 명소도 함께 둘러보자. 논산 돈암서원, 질 좋은 농축산물을 거래하는 화지중앙시장, 은진미륵의 미소가 좋은 관촉사, 과학적이고 기능적인 한옥을 볼 수 있는 논산명재고택, 젓갈과 근대건축이 어우러진 강경근대문화코스 등을 함께 돌아보려면 하루 나들이로 벅차다. 논산시청 관광체육과 (041)746-5741~3
전북 군산 임피역-시간이 멈춘 흔적을 찾아서
전북 군산시에 있는 임피역은 1924년 일제가 쌀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었다. 실적이 좋았는지 1936년에 보통역으로 승격하고, 역사(驛舍)도 새롭게 지었다. 이때 지은 건물이 원형대로 보존돼 지금에 이른다. 임피역은 서양 간이역과 일본 가옥 양식을 결합한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208호로 지정됐다. 역사 서쪽에는 시계가 귀한 시절, 사이렌과 스피커로 낮 12시를 알리던 오포대도 있다.
2008년 5월 여객 운송이 완전히 중단됐고, 임피역은 지금 말끔한 모습으로 단장해 관광객을 맞는다. 군산 출신 소설가 채만식의 대표작 《탁류》와 《레디메이드 인생》 등을 기초로 한 조형물이 들어서고, 객차를 활용한 전시관도 생겼다. 승강장 쪽에 나무 벤치를 마련해 고즈넉한 간이역 풍경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개항장 군산은 인천이나 목포와 마찬가지로 근대사의 흔적이 많아서 임피역과 함께 여행하기 좋다. 출발점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다. 여러 전시관 중 일제강점기 최고 번화가인 영동상가, 지금의 증권거래소와 비슷한 미곡취인소 등을 생생하게 재현한 근대생활관이 인기 만점이다. 옆에 있는 옛 군산세관 본관은 서울역, 한국은행 본점과 함께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로 꼽힌다. 1908년 대한제국이 벨기에산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해서 지었다.
군산역 근처에 있는 경암동 철길마을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 있는 곳이다.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가운데 철길이 지난다. 1944년 신문 용지 재료를 실어 나르기 위해 준공한 이 선로는 현재 관광명소로 붐비고 있다.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군산 시민의 휴식처로 사랑받는 은파호수공원, 신선한 해산물을 살 수 있는 비응항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군산시청 관광진흥과 (063)454-3302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