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 트라우마도 발목
"상원 권한 약화되면 '제2 무솔리니' 출현" 공포
정치적 혼돈 불가피
WSJ "당장 총선 치르면 반 EU '오성운동' 집권할 수도"
[ 뉴욕=이심기 기자 ]
“로마는 정치개혁이 필요하지만 안정이 우선이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당초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가 헌법개정안 투표를 자신의 퇴진과 연계시키자 무리수를 뒀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4일(현지시간) 치러진 국민투표 결과 개헌안이 예상대로 부결되면서 유럽연합(EU) 4위 경제대국인 이탈리아의 앞날도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혼란에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청년실업률 40% 육박에 빛바래
렌치 총리는 개헌을 통해 상원의원 수를 줄이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해 수십년간 정체된 경제 발전을 촉진하겠다고 구상했다. 이런 개혁 의지와 명분에도 이탈리아 국민은 경제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개헌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2014년 렌치 총리의 개헌안이 처음 공개됐을 때만 하더라도 7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부결된 것은 특히 젊은 층의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2일 “이탈리아가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에 쓰러지는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며 “이는 부분적으로 젊은 유권자들의 환멸 탓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개혁총리’라는 렌치가 나섰지만 이탈리아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0.8%였다. 수년에 걸친 마이너스 성장을 겨우 면하는 수준이었다. 청년실업률은 EU 평균 18.4%의 두 배가 넘는 40%에 육박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자 결혼을 포기하고 부모와 함께 거주하는 18~34세 젊은 층의 비율은 지난해 67.3%에 달했다.
렌치 총리는 지난 9월 취임한 지 30개월 만에 실업률이 13.1%에서 11.4%로, 청년실업률은 43.6%에서 39.2%로 하락했다고 자화자찬했지만 이 정도로 국민의 표심을 돌려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사상 최대 난민 유입도 발목
밀물처럼 유입되는 이민자와 난민도 렌치 총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요인이 됐다. 올 들어 유입된 난민은 17만1000명으로 종전 최고 기록인 17만명을 넘어서면서 이탈리아는 아프리카 난민의 최대 관문이 됐다.
극우 성향의 이탈리아 정당 ‘북부리그’의 활동가는 “렌치 정부가 상원 축소 등으로 매년 5억유로를 절감할 수 있다고 홍보하면서도 매년 25억유로를 난민에게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난민 반대와 반(反)EU를 핵심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는 북부리그는 약 13%의 지지율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끄는 ‘전진 이탈리아(FI)’를 제치고 우파 정당 중 지지율 선두를 달리고 있다.
‘무솔리니 트라우마’도 작용
개헌안이 이탈리아 국민의 파시즘 트라우마를 자극한 점도 렌치 총리가 실패한 원인이라고 현지 언론들은 분석했다. 개헌안은 상원의원 수를 315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상원의 입법권과 정부 불신임권 등 핵심 권한을 없애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상원과 하원이 동등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각종 개혁과제의 추진을 막는 것을 해소하자는 취지지만 행정부와 입법부 간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깬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자칫 중앙정부로 권력이 집중되면서 베니토 무솔리니 같은 무자비한 독재자가 등장하면 민주주의가 후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렌치 총리의 지지층에서도 나왔다. 이탈리아의 경제개혁이 가능하려면 효율적인 정치체제가 절실하다는 현실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과거 독재에 대한 공포가 발목을 잡았다는 시각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현재 의회선거를 실시하면 EU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에 회의적인 제1야당 ‘오성운동’이 30%의 지지를 받아 연합정권을 꾸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경우 ‘이텍시트(이탈리아의 EU 탈퇴)’가 현실화해 EU의 근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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