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탄핵의 역사

입력 2016-12-1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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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현 기자 ] 고대 그리스에서는 정치적으로 추방해야 할 사람 이름을 조개껍데기나 도자기 파편에 써서 제출하는 ‘도편추방(陶片追放)’법을 썼다고 한다. 근대적인 의미의 탄핵(彈劾)이 처음 제기된 건 1376년.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측근 장관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탄핵소추는 하원, 탄핵심판은 상원에서 하는 관례가 생겼다. 18세기 이후에는 하원을 중심으로 내각책임제가 정착되면서 탄핵제도가 유명무실해졌다.

미국에서도 탄핵심판은 매우 드물다. 남북전쟁 직후 혼란기인 1868년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하원 법사위에 의해 탄핵 심판대에 올랐으나 상원에서 1표 차이로 부결됐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코너에 몰린 닉슨 대통령은 탄핵 절차가 시작되기 전에 사임했다.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은 백악관 성추문 사건 조사를 방해하고 위증했다는 혐의로 탄핵을 당했지만 상원 표결에서 살아났다. 사생활 문제로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판단 덕분이었다.

탄핵제도의 두 기둥은 소추와 심판이다. 나라마다 탄핵할 수 있는 권리(탄핵소추권)와 심판할 권리(탄핵심판권)를 가진 주체가 다르다. 양원제 국가에서는 주로 하원이 소추, 상원이 심판을 담당한다. 일본에는 탄핵재판소가 따로 있다. 한국은 독일, 이탈리아 등과 같이 헌법재판소가 심판권을 갖는 구조다.

조선시대에도 탄핵은 있었다. 탄핵이란 용어는 ‘경국대전’의 사헌부와 사간원 규정에 나온다. 부정을 저지르거나 법을 어긴 관원의 죄를 묻고 파면하는 게 대부분인데 소문만 앞세운 풍문탄핵도 많았다. 탄핵을 받으면 곧바로 직무 수행이 정지되기 때문에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곤 했다. 조선 후기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사건도 세자의 장인과 대립한 세력의 탄핵이 발단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에도 탄핵이 발의됐다.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문제로 갈등하던 임시정부 의정원이 1925년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탄핵했다. 이때 물러난 이승만은 1948년 국회 선거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른바 ‘탄핵의 역설’이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과 측근 비리로 탄핵됐다가 가까스로 회생했다.

이번엔 박근혜 대통령이다. 탄핵에 대한 헌재의 결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탄핵 요건이 맞으면 인용(認容), 틀리면 기각(棄却), 청구요건을 갖추지 못했으면 각하(却下)다. 인용 땐 파면이고, 기각이나 각하 땐 국정 복귀다. 이 모든 판단의 근거는 물론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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