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매년 그래 왔듯 겨울 산을 찾는다. 일정이 촉박하면 서울 근교로, 시간이 난다 싶으면 지방 명산으로 새벽 등산을 한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정상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 그렇게 상쾌할 수 없다. 새벽잠을 설친 수고가 대단한 보람으로 돌아온다.
올해는 연말 약속이 많아 친구들과 가까운 청계산에 다녀왔다. 오전 5시에 입구에서 만나 바로 산에 올랐다. 천천히 걸어도 오전 7시 일출 전에는 도착할 수 있다.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이내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다. 지나온 1년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연초에 세운 계획은 무엇이었고, 그 계획을 이뤘는지, 이루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산은 묵묵히 들어준다.
한 시간 남짓 올라 매봉에 도착했다. 겨울 산행의 참맛을 아는 많은 사람이 이미 자리 잡고 있다. 따뜻한 차 한잔과 귤 두어 개를 먹고, 그제야 대지 위에 떠오르는 가슴 벅찬 태양을 바라본다. 황홀한 일출을 보며 이번에는 새해의 결심과 각오를 다진다.
산에서 내려와 닭백숙집을 찾았다. 뜨끈한 백숙에 막걸리를 마시며 사후 강평을 해야 우리의 산행은 끝이 난다. 막걸리. 만만한 값에도 오랜 친구처럼 진득하고 묵직한 의리를 보여주는 국주(國酒)다. 언제 마셔도 기분이 좋지만, 친구들과 겨울 산행 끝에 마시는 이 한잔이야말로 맛을 형용하기 어렵다. 한 해가 끝나고 시작되는 이 무렵, 평소 보고 싶은 친구나 고마운 사람들을 불러 기분 좋게 막걸리 한잔하면 어떨까. 입안 가득 시원해지는 소박한 맛을 느끼며 올 한 해를 소회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막걸리 한잔에 떠오르는 사람이 많다. 삼십 년 가까이 출근할 때마다 항상 힘내라고 응원해 주는 가족들, 잦은 잔소리와 지시에도 언제나 제 몫을 다해주는 직원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갈 때 매일 안전하게 운전해 주는 담당 기사, 지난 두 달간 졸필칼럼에 과분한 격려를 보내주신 주변 지인 여러분까지. 이들 외에도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많은 지원군이 있어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닐는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성격에 쉽게 하지 못한, 고맙다는 말을 지면을 빌려 전하고 싶다. “올 한 해도 참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막걸리 한잔 합시다.”
하만덕 < 미래에셋생명 부회장 affirmation01@miraeasset.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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