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와서 좌절 맛본 IT 수재들
"이럴려고 공부했나…"
배달기사 신랄 비판에 개발 마인드 바꿔
"돈보다 의미찾고 싶다"
아이를 낳는 기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모바일 서비스를 처음 세상에 선보일 때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다. 스마트폰 속 앱들은 누구의 손에서 어떻게 왜 태어났을까. 세상에 아무렇게 쓰는 앱은 있어도 아무렇게 만들어진 앱은 없다. 'Why not(왜 안돼)?'을 외치는 괴상한 IT업계 기획·개발자들. [박희진의 괴발개발]에서 그들의 개발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한다.
김형설 메쉬코리아 연구소장(31)은 어딜 가도 잘한다는 소리만 듣고 자랐다.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컴퓨터공학 박사 학위를 따고 HP 랩스, 마이크로스프트 빙 등 굵직한 미국 정보기술(IT) 기업에서 근무했다. 세계정보경시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이력도 있다. 이정도면 한국에서 번듯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하나는 잘 꾸려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못쓴다" "갖다버려라"
그에게 좌절감은 낯선 감정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배달대행 앱(응용프로그램) '부탁해!'를 배달기사들에게 내밀었을 때 처음 느껴봤다.
"미국에선 기획이든 개발이든 자신감에 차있었습니다. 그 당시엔 언제나 '내 생각이 맞다'는 확신도 있었고요. 한국에서 크게 한 판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12년 유정범 메쉬코리아 대표의 제안으로 회사에 합류했다. 유 대표와 그는 유학 전문 과외 교사와 제자로 처음 만났다. 배영섭 메쉬코리아 커머스랩장(30)도 유학 준비 중 유 대표와 인연을 맺었고, 미국 오라클 본사에서 근무하다 연락을 받았다. 유 대표 역시 미국 컬럼비아대 경영학석사(MBA)를 마친 수재다.
이들이 2013년 1월 내놓은 부탁해!는 유 대표의 아이디어로 출발했다. 당시 지역별로 운영되고 있던 심부름 업체를 묶어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개발자들의 화려한 이력 만큼 앱 개발은 순조로웠다. IT 기반 물류 기업의 꿈에 성큼 다가선 듯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현장에서 배달기사들에게 공개한 기사용 앱엔 부정적인 평가만 쏟아졌다. "이런 건 현장에서 못쓴다"며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미국에선 우등생 소리도 들었는데 속이 많이 상했죠. 이럴려고 공부했나 싶기도 했고요. 어쨌든 제대로 깨지고 나니 정신이 번뜩 들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서비스 개발에 대한 마음가짐이 완전히 바뀐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사실 제 아이디어와 판단으로만 서비스를 만들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날 이후로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데 집중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처음 만든 앱에서 뜯어고쳐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버튼 하나의 크기, 정보 나열 순서도 배달기사들의 의견을 기준으로 결정했다.
"저희도 평소에 일반 소비자용 앱을 많이 접하다보니 처음엔 무조건 예쁘게 만들려고 했어요. 한 눈에 봐도 쓰고 싶도록 감각적이고 세련되 게 만들고 싶었죠. 그렇게 신경써 만든 앱을 기사님들에게 보여드렸더니 돌아온 게 '버튼이 뭐냐'는 질문이었어요."(배영섭 메쉬코리아 커머스랩장)
다른 배달 앱들과 달리 부탁해!에만 있는 '실시간 주문 추적' 기능도 업계의 목소리가 적극 반영된 것이다. 주문자가 실시간으로 배달기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음식점이나 배달대행업체가 받는 독촉 전화 수를 줄였다.
사업 초반엔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나가는 개발자들이 꽤 됐다. 유학파에 IT 업계 경력도 뒤지지 않는 이들이 현장에서 싫은 소리를 듣는 게 힘들었을 것이란 얘기다.
메쉬코리아는 지난해 부탁해!의 기사용 앱을 전문화해 이륜차 물류 인프라 브랜드 '부릉'을 선보였다. 특히 메쉬코리아의 IT 기술력이 총동원된 '부릉 TMS(물류관리스템)'는 특허 출원한 알고리즘을 통해 효율적인 자동 배차와 배송 경로 제안이 이뤄진다. 현재 싱가포르 최대 식료품 판매업체인 어니스트비와 신세계그룹 온라인 쇼핑몰인 SSG닷컴 등이 부릉 TMS를 이용하고 있다.
"TMS는 자동 배차의 효율성을 높이는 게 핵심에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기사 한 명당 이동거리를 최소화해 유류비를 줄이도록 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뿐 아니라 배차에 고려해야할 요소가 40개가 넘어요. 예를 들어 한 배달대행 업체 기사들이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마주치게 하면 안돼요. 배달 건수로 인센티브가 책정되기 때문에 내가 아닌 다름 사람에게 근처 주문이 배차된다는 건 기사님들에게 민감한 문제이거든요."(김 연구소장)
"지역별로도 달라요. 시골의 작은 동네는 모두가 선호하지 않는 지역이라 '뺑뺑이'를 돌려야 하고, 복잡한 대도시에선 그 지역을 잘 알고 익숙한 기사에게 우선 배차하죠. TMS는 현장 상황을 반영해 유연한 개발이 중요한 것 같아요."(배 커머스랩장)
둘은 지금까지 메쉬코리아에 남아 자신들과 함께 하는 개발자들에겐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의미있는 일을 하자'는 목표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 최근에 그들은 배달기사들이 전보다 더 나은 근무환경에서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데서 의미를 찾고 있다.
"'부릉' 브랜드 이름을 짓고 로고를 만들 때 가장 신경썼던 게 프로페셔널한 느낌을 주는 거였어요. 로고에 캐릭터를 넣고 글씨체도 더 귀엽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기사님들이 싫어하셨어요. 기사님들 얘기 중엔 오토바이 그림은 넣지 말아달라는 것도 있었어요. 기존 이미지랑은 완전히 다른 걸 원하셨던 것 같아요."(배 커머스랩장)
"저희끼리 그런 얘기를 자주 해요. 솔직히 뭘 해도 돈은 벌 수 있지 않냐면서요. 부탁해!를 만들고 운영하면서 배달 업계 근무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지 알게 됐어요. 늘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는 직업인데 보험도 잘 안되고 고용도 불안해요. 사회적인 이미지도 더 개선돼야 하고요. 기사님들이 부릉 로고나 앱의 작은 것 하나 하나를 마음에 들어하실 때 보람을 느낍니다."(김 연구소장)
박희진 한경닷컴 기자 hotimp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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