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그램 지음 / 이건 외 옮김 / 에프엔미디어 / 408쪽│1만8000원
저평가된 기업 살린 버핏, 우량 기업 망하게 한 카넬…
미국 주주행동 100년사 '빛과 그림자' 분석
[ 송태형 기자 ] 세계 2위 규모의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은 지난 10월 삼성전자 이사회에 인적 분할과 배당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지난해 7월 ‘위임장 대결’에 이어 삼성에 대한 ‘2차 행동’에 나선 것이다. 지난달에는 ‘라임 데모크라시’라는 이름의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국내에 처음 등장했다. 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 원칙을 담은 ‘한국형 스튜어트십 코드’ 제정이 초읽기에 들어갔고, 집중투표제 등 주주들의 경영권 제한에 초점을 맞춘 상법 개정안(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의원 발의)의 국회 통과 여부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국내 증권가에서 새해 주목해야 할 투자 트렌드 중 하나로 주주행동주의를 꼽는 요인들이다. 주주행동주의는 주주들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뜻한다. 투자한 기업의 수익이나 경영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식을 팔아버리는 소극적인 투자가 아니라 주주권을 행사해 기업가치 제고 등의 변화를 이뤄내는 것이다.
《의장! 이의 있습니다》는 미국 주주행동주의의 100년 역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헤지펀드 매니저이자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외래교수인 제프 그램이 미국 기업사에 한 획을 그은 8대 주주행동 사건을 중심으로 주주와 경영진의 역사적인 대결을 심층 분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워런 버핏의 스승으로 ‘현대 증권투자이론의 아버지’ ‘가치투자의 태두’로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은 현대 주주행동주의의 서막을 연 인물이다. 1926년, 32세의 청년 그레이엄은 기업가치에 비해 주가가 저평가됐다고 생각한 석유송유관회사 노던파이프라인의 경영진을 찾아가 “회사에 쌓아둔 잉여현금을 주주에게 분배하라”고 요구했다. 경영진은 “우리 방식이 싫으면 주식을 팔고 떠나라”며 묵살했다. 그레이엄은 물러나지 않았다. 최대주주인 록펠러재단에 행동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소액주주들을 일일이 만나 위임장을 받아냈다.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경영진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싸움을 포기하고 주주들에게 잉여현금을 나눠 줬다.
1980년대는 칼 아이칸으로 대표되는 ‘기업사냥꾼’의 시대였다. 아이칸은 2005년 KT&G 주식을 대량 매수하며 경영진을 공격한 인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막대한 차익을 챙기면서 외국 자본의 ‘먹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초창기 아이칸은 단순한 그린메일러였다. 자기가 보유한 주식을 비싼 값에 되사라고 경영진을 압박하는 식이었다. 1985년 거대 기업 필립스페트롤리엄을 인수한 사건은 차원이 달랐다. 그는 공개매수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자금 조성에 자신 있다’는 서한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주주들은 말뿐인 서한에 거짓말처럼 마음이 움직였다. 이후 이런 내용의 서한은 전통으로 자리잡아 기업 인수의 자금줄로 이용됐다.
저자는 이와 함께 사기 사건에 휘말려 저평가된 아메리칸익스프레스를 살리기 위한 버핏의 정의로운 행동주의, 경영진의 전횡으로 무너져 가는 제너럴모터스(GM)를 살리려고 행동에 나섰다 쫓겨난 로스 페로의 사례, 우량 기업 BKF캐피털을 기어코 무너뜨린 카를로 카넬의 왜곡된 주주행동, 값싸고 효과적인 펜대를 무기로 휘두르는 헤지펀드 행동주의 등을 생생하게 전하며 주주행동주의의 흐름과 변화, 전략을 짚어준다.
책에 소개된 사례들은 주주행동주의가 선용될 수도, 악용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소중한 자산을 낭비하는 비효율적인 기업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지만, 근시안적인 의사결정을 조장해 기업을 혼란에 빠뜨릴 가능성도 있다.
노던파이프라인, GM, 필립스페트롤리엄 등 주주행동주의의 표적이 된 기업은 대부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문제의 원인은 무관심한 주주, 열심히 일하지 않는 이사회, 방향을 잃은 경영진 등에 있었다. 저자는 “상장 기업에 이런 문제가 존재하는 한 주주행동으로 이득을 볼 기회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한다.
기업이 적대적 인수를 막기 위해 기존 주주에게 신주를 매입할 권리를 주는 포이즌 필, 이사들의 임기를 분산시켜 차례로 선임하는 시차임기제 등 경영진이 주주행동주의를 무력화하는 전략도 소개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방법은 시장에서 형성되는 주가가 회사의 제 가치를 반영하게 함으로써 차익거래의 기회를 원천 차단하는 것이다. 저자는 “주주를 경시하면 패배할 확률이 높다”며 “경영진은 회사의 약점을 미리 파악하고 이를 투자자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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