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경 처한 삼성 압박…인수가 높이기 나선 듯
2008년에도 신사업 차질
이건희 회장 기소되며 태양광 투자 기회 놓쳐
[ 노경목 기자 ]
“해외 투자자의 입맛에 맞는 빌미를 딱 좋은 시점에 특검이 마련해준 셈입니다.”
자본시장 관계자는 13일 하만 소액주주의 삼성전자 인수 반대 소송을 이같이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제시한 주당 112달러의 주식 매입가는 인수 발표 전 한 달 평균가보다 37% 높은 가격”이라며 “인수가 무산되면 주가가 급락해 손실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상식에 어긋난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특검 조사로 삼성전자가 곤경에 빠진 가운데 지난해 4분기 3년 만에 최대 실적을 낸 점을 이용해 더 많은 수익을 챙기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사태 진전에 따라 하만 인수뿐 아니라 삼성그룹이 추진하는 다른 인수합병(M&A)과 계열사 매각까지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창 사업재편을 하고 있는 삼성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불발 위기 하만 인수
지난해 11월 삼성전자는 하만을 80억달러(약 9조4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이사회끼리 합의한 사항인 만큼 올 3월 이전에 열리는 하만 주주총회에서 50% 이상의 주주가 동의해야 확정된다. 그런데 하만 주식 2.3%를 보유한 헤지펀드 애틀랜틱투자운용이 인수에 반대한 데 이어 이번엔 소액주주까지 반대 소송에 나섰다. 모두 “인수가가 낮다”는 이유다.
인수 발표 직전 하만은 뉴욕증권시장에서 주당 87달러에 거래됐다. 지금은 삼성전자가 제시한 매수청구가 근처인 주당 110달러까지 올랐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매수청구가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헤지펀드들이 쓰는 전략”이라며 “하만 투자자들이 뉴스를 통해 삼성전자의 상황을 파악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가 무산되면 하만 투자자들의 손실도 만만치 않다. 실망감에 주가가 인수 발표 시점 이전보다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서다. 그런데도 인수 반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특검 수사 등으로 곤경에 처한 삼성이 하만만큼은 포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삼성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인 하만 인수는 오랜 연구의 결과다. 삼성은 2011년부터 자동차 전장(電裝)사업 진출을 모색해왔다. 한때 미래전략실과 지금은 한화에 매각된 테크윈에 관련 조직을 별도로 꾸렸다. 2015년에는 삼성전자에 전장사업팀을 신설했다. 하지만 부품의 신뢰성 검증과 거래처 개척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전장사업 특성상 M&A가 가장 적절한 해법이라고 판단해 지난해부터 꾸준히 M&A를 추진해왔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삼성의 주력인 전자산업과 시너지를 내려면 전장업체를 인수해야 하는데 하만 건이 어그러지면 대안이 마땅치 않다”며 “M&A 없이 관련 시장에 진입하려면 최소 3~5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 사업 투자 차질 생기나
그룹 수뇌부에 대한 특검 조사로 신규 사업이 차질을 겪는 것은 삼성에 낯설지 않다. 2008년에도 특검 조사로 당시 삼성이 추진하던 사업 중 일부가 무산된 바 있다. 당시 삼성은 태양광과 LED(발광다이오드)를 새로운 성장사업 분야로 보고 육성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 기소에 따른 경영권 공백으로 적절한 시점에 투자하지 못했다.
2010년 경영에 복귀한 이 회장은 두 사업을 ‘5대 신수종사업’에 넣고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이미 선발업체와 큰 격차가 벌어진 뒤였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태양광 투자 시점을 놓쳐 관련 사업이 사실상 전무한 것은 뼈아프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프린팅솔루션사업부 매각 등 사업재편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거래 상대방인 휴렛팩커드(HP) 등 미국 기업들이 이 부회장이 받고 있는 뇌물죄 혐의에 민감해서다. 삼성 관계자는 “검찰 조사가 시작된 지난해 11월부터 이 부회장의 해외 출장 등이 중단된 상태”라며 “매출의 90%를 해외에서 일으키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서는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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