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캠프 측 “진보-보수 떠나 실용적 관점에서 접근”
“따뜻한 시장경제 실현하는 반기문식 제3의 길”
제3지대에서 ‘빅텐트’ 치기 위한 고리 역할로 삼을 듯
“‘선거용 구호정치’, ‘반기문식 半半화법’ 불과”비판도 제기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귀국 뒤 자신이 ‘진보적 보수주의자’라는 점을 꾸준히 내세우고 있다. 귀국편 기내에서 “사람들은 저를 보수주의자로 본다. 하지만 저처럼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이도 별로 없다”며 “저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이 대통합, 소통,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좌·우를 아우르는 ‘진보적 보수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나온 화두들이라고 캠프 관계자는 말했다.
‘진보적 보수주의’에 대해 반 전 총장 측은 ‘반기문식 제3의 길’이라고 하지만 ‘선거용 구호정치’, ‘반기문식 반반(半半)화법’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진보적 보수주의자를 내세우는 이유에 대해 캠프 관계자는 15일 “반 전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세계를 다녀보니 보수, 진보 어느 한쪽에 치우친 진영 논리로는 나라의 발전을 가져올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진보와 보수가 균형을 이루는 실용적 관점에 접근을 한 것”이라며 “진보적 보수주의라는 관점에서 성장, 복지, 노동, 조세, 안보 등 분야별로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다듬어서 내놓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산업화의 기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 패러다임을 내놔야 한다”며 “성장 기조 아래 소외계층을 보듬어 나가는, 성장과 복지가 균형을 이루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수·진보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으면서 양측을 모두 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전략이다. 반 전 총장과 가까운 성일종 새누리당 의원은 “반 전 총장은 진보·보수 이런 걸 안 따지고 실용적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 측의 오준 전 유엔주재 한국 대사는 “(반 전 총장은)외교·안보는 전통적 스타일(보수)인 반면, 경제·사회 이슈들은 중도쯤 된다”고 했다. 반 전 캠프에 참여하고 있는 곽승준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따뜻한 시장경제’, ‘진화된 자본주의 5.0’을 ‘진보적 보수주의’의 일환으로 앞세우고 있다. 곽 교수는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기업이나 부자들이 나눔 배려를 실천하는 따뜻한 시장경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곽 교수는 버핏세(부유층 자본소득에 적용되는 소득세)나 조지 소로스의 기부가 따뜻한 시장경제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양극화 심화와 사회적 저항을 불러올 수 밖에 없어, 민간 영역에서 자발적인 부의 재분배가 이뤄지는 쪽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반 전 총장이 귀국 기자회견에서 “나라는 갈가리 찢어지고 경제는 활력을 잃고 사회는 부조리와 부정으로 얼룩져 있다”며 “부의 양극화, 이념, 지역, 세대간 갈등을 끝내야 한다. 국민 대통합을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고 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또 “재벌의 영향이 너무 크니까 중소기업이 살아날 길이 없다”며 “원칙적으로 재벌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도 같은 차원이다. 반 전 총장이 불평등 해소와 사회통합 등을 주장하는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의 자문을 받고 있는 것은 ‘진보적 보수’ 화두와 관련이 깊다.
반 전 총장이 귀국 뒤 연령·계층을 넘나드는 ‘이념적 종횡’을 하는 것은 ‘진보적 보수’ 전략의 일환이다. ‘진보적 보수’는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발전 모델을 주창한 영국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제3의 길’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반 전 총장 측 관계자는 ‘진보적 보수’는 ‘반기문판 제3의 길’이라고 했다.
‘진보적 보수’를 내세우는 것은 보수 연합만 가지고는 대선 승리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국갤럽이 지난 13일 공개한 차기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지율은 31%, 반 전 총장은 20%였다. 이재명 성남시장 12%,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7%, 안희정 충남지사 6%,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5%,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3%,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2% 순이었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반 전 총장 측은 국민의당, 바른정당,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 손 전 대표 등과 제3지대에서 ‘빅텐트’를 치기 위해 ‘진보적 보수’를 고리 역할로 삼는다는 전략이다. 김 전 대표는 경제민주화, 유 의원은 ‘따뜻한 보수’를 내세우고 있다.
보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이들 세력들과 연대를 통해 중도, 수도권, 호남을 끌어들어야 대선에서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다. 때문에 반 전 총장 측은 당분간 새누리당과 보수와 일정 정도 거리를 둔다는 계획이다.
반 전 총장의 이런 전략에 대해 반론도 적지 않다. 자칫 보수 집토끼를 놓칠 수 있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구에 지역구를 둔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새누리당 지도부가 친박(친박근혜)계 핵심을 몰아내려는 것은 반 전 총장 영입 전략과 맥이 닿아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반 전 총장이 중도, 진보를 표방하면 주요 지지 기반인 보수표가 떨어져 나갈수 있다”고 말했다.
야당은 반 전 총장의 정체성이 여전히 모호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최순실 사태로 보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나빠지니 진보라는 수식어를 붙여 포장한 것일 뿐이라고 날을 세우고 있다. 문 전 대표는 “지금 우리 상황은 진보·보수 또는 좌우의 문제를 얘기할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고연호 국민의당 수석대변인은 “‘진보적 보수’라는 것이 참 묘한 말”이라며 “진보ㆍ보수의 이데올로기를 말하기 전에 반 전 총장은 자신이 무엇을 할 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했다. 유승민 의원도 “반 전 총장이 보수인지, 진보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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