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CEO & Issue focus] 니토리 창업자 겸 회장 니토리 아키오, 삿포로의 조그만 동네 가구점을 일본 최대 가구회사로 일궜다

입력 2017-01-19 16:20  

'3전4기' 끈질긴 도전과 집념

가난에 시달리고 왕따에 울고
쌀 배달하며 어린시절 보내
아이들 괴롭힘에 성적은 늘 꼴찌
대학 졸업후 23세에 가구점 창업
붙임성 좋은 아내 덕 매출 쑥쑥

미국 가구시장 시찰 후'충격'
소파·침대·의자 등 품목 다양
벽장식 옷장 설치로 실내 깔끔
가격도 일본의 3분의1로 저렴
귀국 비행기에서 성공 다짐

"모방이 쌓이면 혁신이 된다"
일본 최초로 홈퍼니싱 도입
유니클로 SPA방식도 접목
체인점화·자동화로 대량생산
2015년 매출 4580억엔 달성



[ 임근호 기자 ] 니토리(ニトリ)는 일본 1위 가구회사다. 질 좋은 제품을 싼값에 공급해 ‘일본의 이케아’로 불린다. 1967년 니토리를 창업한 니토리 아키오(似鳥昭雄) 회장은 “내 힘으로 사람들 월급을 3배 올려주기는 어렵지만 가구 가격은 3배 더 싸게 낮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업 이념도 “주거의 풍요로움을 세계인에게 제공한다”로 정했다. 니토리 회장은 학창 시절의 자신을 “자기 이름조차 (한자로) 못 쓰는 열등생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다른 끈기와 집념은 삿포로의 작은 동네 가구점을 일본 최대 가구회사로 바꿔 놓았다.

가난해 어릴 때부터 쌀 배달

그는 1944년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얼마 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해 사할린이 소련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니토리 가족도 1947년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니토리의 외할머니가 살던 홋카이도 삿포로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니토리의 아버지는 콘크리트 제품을 만들고 주택의 기초 공사를 하는 토목회사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쌀을 암거래해서 파는 장사를 했다.

니토리 회장은 2015년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연재한 ‘나의 이력서’라는 글에서 “가혹한 어린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아동 학대로 여겨지지만 당시만 해도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도와야 했고, 잘못하면 부모가 때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쌀 배달을 위해 내 키보다 큰 자전거를 받았는데 넘어져서 쌀이 땅에 흩어지면 그날은 모래투성이 밥을 먹어야 했다”고 말했다. 깨끗한 쌀은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했다. 가난해서 누더기의 옷밖에 입지 못했고, 늘 암거래 쌀을 배달했기 때문에 같은 반 아이들이 괴롭히고 놀렸다. 공부는 꼴찌를 도맡다시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는 부모에게 “공부를 더 하고 싶다. 대학에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아버지의 콘크리트 사업을 이어야 했는데 일이 고되 이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62년 삿포로단기대에 입학했다. 1964년 졸업한 뒤에는 편입 시험을 쳐 4년제 대학인 홋카이가쿠엔대 경제학부에 들어갔다.

그가 가구점을 창업한 것은 1967년이다. 아버지가 “회사가 매년 적자라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할 것 같다. 이쪽은 장래성이 없다”며 “네 앞길을 찾아보라”고 말한 뒤였다. 가구점 이름은 ‘니토리 가구 도매센터 북지점’. 도매점이 아니지만 물건값이 싸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도매라는 말을, 센터는 매장이 크고 종류가 많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북지점은 다른 곳에 본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기 위해 붙인 잔꾀였다.

하지만 개점 1주일 정도가 지나자 손님이 확 줄었다. 4개월이 지나도 매출이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돈을 못 버니 먹는 것이 변변치 않았고 건강도 나빠졌다. 결국 어머니의 재촉에 여덟 번째로 맞선을 본 모모요와 1968년 결혼했다. 모모요는 애교 있고 붙임성이 있었고 억지를 쓰는 ‘진상 고객’에 맞서는 배짱도 있었다. 개업 초기 500엔에 지나지 않았던 연매출은 결혼 1년 뒤 1000만엔으로, 그 다음해엔 1500만엔까지 늘었다.

미국 가구점 시찰 갔다 풍요로움에 충격

니토리 회장이 동네 가구점에 머물던 니토리를 일본 제일가는 가구회사로 키우기로 마음먹은 것은 1972년 업계 동료들과 함께 미국 가구점 시찰을 갔을 때였다. 시어즈 백화점과 가구 전문 체인점 래빗 등을 둘러봤는데 가는 곳마다 충격을 받았다. 장롱 위주의 일본 가구와 달리 미국에선 소파, 침대, 테이블, 의자 등 네 다리 가구 중심이었다. 옷장이나 서랍장도 벽장처럼 설치된 커다란 장 안에 편리한 구조로 들어가 있어 옷장 문을 닫으면 방안이 넓고 깔끔했다. 그는 “미국인이나 일본인이나 사람은 누구나 같다. 언젠가 일본인도 지금 이곳의 편리함과 안락함을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미국 가구값은 일본의 3분의 1 정도였다. 니토리도 싼 가격에 가구를 판매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미국에 비하면 턱없이 비쌌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런 풍요로움을 일본에서 실현하겠다고 결심했다.

1979년 니토리 회장은 2002년까지 매장 수 100개, 매출 1000억엔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본 최초로 홈퍼니싱 개념을 도입했다. 가구뿐 아니라 식기와 생활용품, 인테리어용품 등을 모두 한 매장에서 팔겠다는 것이다. 1980년에는 삿포로에 일본 최초로 6층 높이의 가구 전용 자동화 창고를 마련했다. 가구점의 체인점화와 함께 이런 자동화 물류 시스템의 도입으로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게 됐고 그만큼 가격도 낮출 수 있었다.

3전4기의 집요함과 끈기가 성공 비결

니토리 회장은 “모방이 쌓이면 혁신이 이뤄진다”고 말한다. 2000년대 들어 유니클로의 비즈니스 모델을 참고해 가구에 SPA방식을 도입했다. SPA 방식은 마케팅과 제조, 유통, 판매를 본사에서 운영하면서 원가를 낮추고 품질을 높이는 시스템이다. 니토리는 품질 관리를 위해 자동차 업계의 품질관리법을 따라하고 국내 물류는 택배회사나 물류회사 시스템을, 해외 물류는 종합상사를 모방했다.

니토리는 일본 매장 420개를 비롯해 대만과 미국, 중국에도 매장을 갖고 있다. 해외 생산공장도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에 퍼져 있지만 경영과 물류 효율화로 높은 이익률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니토리는 매출 4580억엔에 영업이익 730억엔을 내 영업이익률 16%였다.

니토리 회장은 작은 동네 가구점을 대형 가구회사로 키운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교섭이란 거절당한 순간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대부분은 세 번 거절당하면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나는 네 번째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일이든 성공하려면 좀 더 끈덕지게 버틸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애교와 집념이 중요하다. 암거래 쌀을 팔 때 어머니에게서 배운 교훈이다.”

스물셋의 나이에 가구점을 열어 어떤 도매상도 그에게 가구를 공급해주지 않으려 했을 때, 은행에서 대출을 해주지 않을 때, 땅주인이 매장을 세울 땅을 팔지 않으려 할 때 그는 몇 번이고 찾아가 설득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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