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다. 그러나 모 방송국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은 ‘다시보기’로 꼭 본다. 내가 예전에 들었던 곡을 가수들이 편곡해 부르며 승부를 겨루는데 가사를 화면에 띄워주는 게 좋다.
언젠가 이장희 편이 방영된 적이 있다. 나는 그와 비슷한 또래로, 그의 노래 중에는 ‘그건 너’ ‘한잔의 술’ 등 애창곡이 많다. 그리고 그의 자유스러움, 이야기하는 듯한 노랫말은 나의 감성을 자극한다. 방영된 노래 중에 한 노랫말이 마음속에 깊게 들어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물어본다/ 용기를 내어/ 알 수 없는 하느님께 진정으로 물어본다/ 창조하신 그분에게/ 그분이 진짜라면 왜 대답이 없는 걸까/ 왜 나를 이 세상에 던져 오갈 바를 모르게 하나.’
나는 이 노랫말을 들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시작이 어디인지 끝없이 궁금해하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신에게 떼를 쓰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질문에 대해 논리에 맞게 설명하는 가르침은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단편적인 것뿐이다.
세상을 자유롭게 살았던 사람 중 많은 이들이 어느 날 문득 어려움을 느끼고 신을 찾는다. 행복했던 시절, 자유롭고 호기롭게 살았던 좋은 날들은 다 잊어버리고 용기를 내고 불만을 섞어 신께 말씀을 드린다. 왜냐고 고함을 지르면서 대들 듯이 다가간다. 또 왜 선과 악을 둬 우리 인간을 이렇게 고통 속으로 내몰았는가라고 묻는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란 영화에서 주인공 테비에(하이만 투폴 분)는 자신이 겪는 모든 것에 대해 신과 이야기한다. 딸들의 사랑도 통제할 수 없는 아버지, 사람들이 만든 또 다른 무력(武力)인 정치, 그 안에서 울고 웃으며 한 생을 보내는 주인공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신이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기댈 수 있고, 희망과 삶의 사유를 발견하는 곳도 신이다. 나도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수없이 통제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야, 내가 누군지 아냐? 내가 바로 하느님의 손자다!”라고 허공에 대고 큰소리를 한 번 지르고, 새 삶의 용기를 갖고, 어떤 삶의 어려움도 견디며 살아간다.
언젠가 유명한 의사 선생님의 암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나는 그 강의를 들으면서 신의 위대한 선물은 곧 나의 삶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내가 숨 쉴 수 있고 물을 마시고 또 시원하게 내 몸을 비울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며 살아 있는 동안 감사를 드리는 게 올바른 신앙의 태도이고 죽음을 맞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안고 이를 평온하게 맞을 수 있는 게 인간이 간직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인 신앙이라고 느꼈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또 남과 더불어 살아가다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함을 안다. 그리고 생 안에서 느끼는 수많은 애환을 극복하는 하나의 해법으로 신을 만난다. 그리고 그 신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면서 그래도 책임을 전가할 그 누군가가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고 미소 짓는 것이 우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유영희 < 유도그룹 회장 cmyu@yudohot.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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