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심기 특파원) “공직에 계시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나요?”
2012년 12월 기획재정부는 과천 정부청사를 떠나 부랴부랴 세종 정부청사로 이사했다. 대통령 선거를 약 열흘여 앞두고 여권 후보를 위한 충청도 표심을 잡기 위해 무리한 이사를 감행했다.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복도는 먼지투성이었고, 페인트 냄새가 빠지지 않은 실내는 환기를 위해 영하의 날씨에도 모든 창문을 열어야 했다. 청사 외곽은 포크레인과 대형 트럭이 내는 소음으로 가득 찼고, 출퇴근 버스는 신호등조차 설치되지 않은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김익주 차관보(무역협정국내대책본부 본부장·1급)의 사무실을 찾는데도 한참 걸렸다. 차관보를 포함한 기재부 1급 사무실은 1, 2차관 집무실과 나란히 붙어 있었지만 김 차관보 사무실만 공간이 부족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배정됐다. 뱀처럼 휘어진 세종청사 4동의 ‘난해한’ 설계 때문이기도 했다. FTA 대책본부는 그러나 두 달 만에 또 다시 이삿짐을 싸야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고 정부조직이 개편돼 통상기능이 산업통상자원부로 넘어가면서 조직 자체가 없어졌다. 김 차관보는 “나야 옷을 벗어도 상관 없지만…”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친정’을 떠나 부처를 옮겨야 하는 아래 직원들의 처지가 마치 자기 잘못인 것처럼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공사판과 다름없는 세종청사 주변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 차관보는 “별로 내세울만한 일도 없는데…”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한참 후에 “이란 원유 수입을 재개한 게 그나마 기억에 남는다”고 짧게 말했다.
2010년 미 정부와 의회는 이란의 핵프로그램에 맞서 경제제재(엠바고)에 나섰다. 미국과 교역을 하는 전 세계 모든 나라들도 여기에 동참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으로선 값싸고 품질이 월등한 이란의 원유가 꼭 필요했다. 서슬퍼런 미국의 기세에 밀려 이란과의 모든 무역거래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인구 1억명이 넘는 수출시장도 놓칠 수 없었다.
당시 김익주 국제금융국장과 임종룡 기재부 1차관은 ‘원유와 생필품 거래만 이란과 할 수 있도록 미국의 허락을 받아내자’는 목표를 정했다. 문제는 이란에 달러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것처럼 피를 흘리지 않고 살을 베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이 낸 아이디어는 이란 중앙은행의 원화계좌를 국내 은행에 개설해 석유수입 대금과 생필품의 수출 대금을 정산하는 것이었다. 국내 은행에 입금된 이란중앙은행 자금은 주한 이란대사관이 자금인출을 하지 못하도록 에스크로 계좌로 묶어뒀다. 이란에는 1달러도 흘러가지 않고, 원유 수입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란시장을 사실상 독점할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미 국무부와 의회를 설득시켜야 한다는 더 큰 난관이 남아 있었다. 외교부는 “말도 안된다”며 난색과 함께 반대를 표시했다. 자칫 미국과의 관계만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기재부가 직접 나서서 국무부와 담판을 짓기로 했다.
“국무부도 처음에는 황당하다고 했죠. 의회를 설득해야 하는데 정치적으로 어렵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래도 우방국인 한국의 의견도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집요하게 설득했죠. 단 1달러도 이란에 흘러가서 핵프로그램에 전용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허락을 받아냈어요.”
이후 이란중앙은행과의 협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2010년 9월 국내 은행과 이란중앙은행간 원화결제 실시에 공식 합의했다. 이렇게 이란의 원유 수입은 재개됐고, 혜택은 기업을 통해 한국 경제 전체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성과에 비해 언론의 주목은 별로 받지 못했다. “신문에 대서특필할 정도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공치사를 해서는 안될 일이었죠. 더구나 미국을 자극하면 안됐으니…. 하지만 그게 공직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공을 앞세우려고 하면 사심(私心)이 들어가거든요.” 자기 공치사에 약한 탓이었을까. 김 차관보는 대선 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공직을 떠나 국제금융센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별명은 ‘영원한 스트라이커’였다. 과천 정부청사 시절 아침 8시쯤에 주차장에 도착하면 땀에 흠뻑 젖은 운동복 차림에 한 손에 축구화를 들고 과천 1동 청사로 들어서는 김 차관보를 가끔 볼 수 있었다.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후배들과 조기축구를 하고 출근하는 모습이었다. 세종청사로 옮긴 뒤로는 후배들과 같이 땀 흘리며 호흡을 같이 하기가 어렵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막무가내식 발언에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한국도 이달 미국서 열리는 통상회담의 의제와 전략을 짜느라 부심하고 있다. 주형환 산업부 장관은 김 차관보처럼 강단 있는 자세와 창의적인 해법을 갖고 워싱턴을 방문할 필요가 있다.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 누구보다 열의를 갖고 모범적인 공직 생활을 보낸 김 차관보가 그립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끝)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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