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를 졸업하고 40대에 접어든 직장인 1600여명에게 물었다. “당신이 현재 하는 일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대학 시절 가장 도움이 된 수업은 무엇인가.” 뜻밖에도 90% 이상이 “글쓰기”라고 대답했다. “그때 ‘혹독한 글쓰기’를 배우지 못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지금의 나를 키운 건 글쓰기 멘토링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글쓰기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걸 절감한다.”
이공계 명문인 매사추세츠공대(MIT) 졸업생들도 그랬다. 이들의 강력한 건의 덕분에 MIT의 ‘글쓰기 센터(Writing Center)’가 탄생했다. 대부분 기술·과학계로 진출하는 이들이 왜 이런 건의를 한 것일까. 막상 사회에 나가 보니 현장 업무의 50% 이상이 글쓰기와 관련돼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혹독한 글쓰기' 없었더라면…
이들 학교를 비롯해 거의 모든 미국 대학은 ‘글쓰기 센터’를 통해 체계적인 교육을 한다. 하버드에선 학생 전원이 글쓰기 수업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한다. 학부와 대학원생을 위한 프로그램도 단계별로 세분화돼 있다. 1 대 1 첨삭 교육도 철저하게 한다. 교수들이 글쓰기 테크닉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사고의 전개 과정을 스스로 체득하도록 한다. 숙제의 대부분 역시 글쓰기다.
MIT의 글쓰기 프로그램도 비슷하다. 전담 교수진은 30~40명. 시인·소설가뿐만 아니라 에세이작가, 전기작가, 역사가, 과학자 등 전문 분야도 다양하다. 과학저널리즘에서 SF 소설까지 폭넓게 다룬다. 이 과정에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다윈 등 위대한 과학자들이 모두 위대한 작가였다는 걸 일깨워준다.
이렇듯 글쓰기를 강조하는 것은 깊이 있게 사고하는 인재가 많을수록 사회가 발전하고 국가 경쟁력도 강해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사회의 공감대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게 갖춰져 있다. 학생들도 “글을 안 썼더라면 단순 정보만 머리에 잔뜩 집어넣었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라며 “글 쓰면서 생각하고 남과 다른 의견을 말하는 과정에서 한 단계 성장하는 나를 발견한다”고 한다.
서울대도 올해부터 1대1 멘토링
미국만 그런 게 아니다. 유럽에선 중·고교 때부터 에세이 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한국에 교환교수로 왔던 독일의 한 대학 학장은 “운전면허시험 빼고는 모든 게 글쓰기 시험”이라며 “특히 이공계는 승진할수록 문장 표현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글쓰기 교육을 더 한다”고 했다. 글 잘 쓰는 비결을 가르칠 때도 괴테가 ‘사랑하는 여동생에게 짧은 편지를 쓰려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긴 편지를 쓰게 됐다’고 한 대목을 인용한다. 간결한 글이 가장 좋은데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서울대가 올해 신입생부터 ‘글쓰기 능력 평가’를 도입한다. 자연과학대 신입생 200명부터 시작해 내년 이후 전체로 확대할 모양이다. 10~20%에게는 ‘1 대 1 글쓰기 멘토링’도 해준다고 한다. 늦었지만 잘한 일이다. 이화여대 등 다른 대학에서도 글쓰기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니 반갑다.
글쓰기는 인간의 창의성을 빛나게 하는 설계도와 같다. 철학자 베이컨도 “독서는 완전한(full) 사람을, 토론은 준비된(ready) 사람을, 쓰기는 정밀한(exact)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쓰기’야말로 독서와 토론, 성찰이라는 재료로 지은 창의력의 집이다.
고두현 논설위원·시인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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