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상·오성륜 등 의열단원들 일제에 폭탄 던졌던 와이탄
일본 영사관 있던 황푸공원 등 곳곳에 역사의 아픔 남아
지금은 황푸강 물줄기 따라 첨단 건물과 관광객이 빼곡
100년 전 중국 상하이는 동아시아의 뜨거운 용광로였다. 1843년 개항 당시 20만명이던 인구는 19세기 말에 50만명을 넘었고, 1920년대 이미 300만명을 돌파해 대상하이(大上海)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서구 열강들이 제국주의를 쏟아부은 항아리였고, 중국인들에게는 대양으로 나가는 탈출구였다. 중국 땅이면서도 치외법권이란 견장을 찬 조계지가 있는 기묘한 다국적 도시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도 용광로였다. 아나키즘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까지, 파시즘 민족주의에서 식민지 저항 민족주의까지 이념과 사상이 끓어올랐다. 군대, 헌병, 경찰, 조선 밀정, 독립운동가들이 한데 섞인 곳이었다.
의열단원들 무장투쟁 벌였던 와이탄
상하이 곳곳에는 우리 독립운동 역사가 남아 있다. 1910년부터 1937년까지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상하이를 완전히 삼켜버릴 때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오갔다. 상하이 독립운동의 현장 중 하나가 와이탄(外灘)이다. 황푸강을 따라 서양식 건축물이 즐비한 곳이다. 강 건너 푸둥에는 동방명주를 비롯한 고층 빌딩이 찌를 듯하다.
1922년 의열단 소속의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세 요원이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한 곳도 와이탄이었다. 다나카는 일본의 제국주의 국가전략을 세운 지도적 이론가였다. 의열단은 다나카가 상하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푸탄(현재의 와이탄) 부두에 하선하는 순간을 노렸다. 오성륜이 권총으로 먼저 저격하고 김익상이 폭탄을 던지기로 했다. 최후에는 이종암이 칼로 처단하기로 했다. 그날 오성륜이 권총을 쐈으나 다나카 뒤에 있던 영국 여성이 총을 맞고 절명했다. 김익상이 폭탄을 던졌으나 한 선원이 발로 차 강물에 빠뜨리는 바람에 불발됐다. 다나카는 곧바로 피신했다. 오성륜은 도주했고 김익상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다나카를 암살하려 한 곳은 와이탄의 북단인 황푸공원이다. 상하이시 인민영웅 기념탑과 황푸공원 수문참(水文站) 사이에 있다. 와이탄의 화려한 야경 속에서 잠시나마 우리 독립운동사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는 것도 의미가 깊다.
다나카 암살에 실패한 오성륜(1900~1947)은 자동차를 탈취해 도주했으나 영국 경찰에 붙잡혔다. 영국 경찰은 프랑스에, 프랑스는 일본에 넘겼다. 오성륜은 상하이의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됐다. 일본 영사관이 있던 곳은 지금 중국 군대가 사용하고 있다. 황푸공원의 동북쪽 강변에 경비정들이 몇 척 정박해 있는데 그곳이 일본 영사관 자리였다. 황푸공원 북단의 철교를 건너 러시아 총영사관을 지나면 ‘황푸판뎬(黃浦飯店)’이란 건물 옆에 부대 정문이 있다. 물론 군부대 안이라서 일반인이 들어갈 수는 없다.
극적인 탈출과 재회, 그리고 변절
오성륜이 들어간 감옥에는 다섯 명의 일본인 수감자가 있었다. 이들은 오성륜을 동정했고, 오성륜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옥했다. 오성륜은 광둥을 거쳐 독일 베를린으로 갔다. 이곳에서 독일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한동안 그녀의 집에서 살기도 했다. 오성륜은 독일의 소련 영사를 찾아갔고 소련은 그를 모스크바로 보내줬다. 모스크바 동양대학을 거쳐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탈옥 4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오성륜은 독립 혁명가 김산(1905~1938)의 멘토였다. 두 사람은 1927년 광저우 봉기에서 죽을 고비 속에 헤매다가 헤어졌다. 서로 죽은 것으로 생각하던 김산과 오성륜은 1928년 10월 우연히 길가에서 다시 만났다. 바로 와이탄에서였다. 김산은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날 나는 황푸강을 바라보면서 황푸탄을 따라 무작정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환각처럼 하나의 얼굴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럴 수가. 익히 알고 있던 뼈만 앙상한 손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놀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가 죽은 줄 알고 있었어!’ 우리는 마치 한 몸처럼 얼마 동안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성륜은 그 후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갔다. 한때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41년 일제에 검거된 후 변절한 그는 일본 경찰에 협력하다가 일제 패망 후 팔로군에 체포됐다.
독립운동의 용광로에서 첨단 도시로 변모
다나카에게 폭탄을 던진 김익상(1985~?)은 1921년 9월12일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해 경성(서울)의 조선총독부 청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진 인물이다. 총독 척살에는 실패했지만 폭발로 인해 소란해진 틈에 유유히 빠져나와 베이징으로 귀환한 신출귀몰의 투사였다. 그러나 와이탄에서 체포돼 일본으로 끌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감형을 거쳐 20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는데, 출소 후 집으로 찾아온 일본인 경찰과 함께 나간 뒤 실종됐다.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립현충원에 그의 위패가 있는데 후손이 없는 애국지사에게 제를 지내는 무후선열제단에 있다.
독립운동은 본인은 물론 대가 끊기는 희생을 감수한 일이기도 했다. 상하이 여행객에게는 와이탄과 연결해 난징동로(南京東路) 보행가를 걷는 것도 필수 코스가 돼 있다. 널찍한 보행가의 화려한 야경도 중국에 중국이 아닌 곳이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곤 한다. 100년씩은 됐음직한 유럽식 건축에는 라오상하이(老上海)의 정취가 가득하고, 좌우로 즐비한 현대 건축물들은 세련된 의상과 첨단 정보기술(IT) 기기들과 함께 21세기의 상하이를 자랑하는 것 같다.
난징동로에서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사적지 하나를 찾아볼 수 있다. 난징동로 보행가는 동서 약 1㎞ 정도다. 그 중간에 스제광장(世紀廣場)이 있고, 이 광장의 대각선 서북방향으로 셴스대루(先施大樓, 난징동로 670호)라는 바로크식 건물이 있다. 이 건물 1층은 상하이 패션스토어이고 2층 이상으로는 진장즈싱(錦江之星)이란 모텔이 있다. 이곳에서 1922년 고려공산당이 창당됐다. 5월20일부터 23일까지 국내 대표 8인을 비롯해 중국 러시아에서 온 20여명이 모여 회의를 했다. 이동휘 위원장을 수위로 13인의 중앙위원을 선임했다. 이동휘는 1919년 임시정부가 결성됐을 때 국무총리였다. 이동휘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와서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며 임정의 민족 대표성은 크게 확장됐다.
상하이=윤태옥 다큐멘터리 제작자 겸 작가 kimy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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