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영화 속 언덕 없었지만 떡갈나무 길이 반겨주네

입력 2017-02-12 16:51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



미국 남부 지방에 대한 환상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부터 시작됐다. 영화 속 비비언 리는 절세 미녀였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타라 농장’을 지키기로 맹세한다. 타라 농장은 작가인 마가렛 미첼의 머릿속에서 나온 허구의 장소다. 루이지애나주에는 영화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대규모 농장이 남아 있다.

루이지애나의 대농장과 저택을 둘러본 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최면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속에서 인상깊게 본 언덕은 현실에서는 없는 환상의 공간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남북전쟁 전 루이지애나는 미국에서 전국 1위의 부자 주였다. 당시 남부인들은 풍부한 물과 따뜻한 날씨를 이용해 목화나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당시 사탕수수는 백금이었고 목화는 은에 해당할 정도로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방대한 남부의 농장은 미시시피 강을 따라 존재했다. 강에 인접한 루이지애나 농장과 저택들은 대부분 평평한 밭에 자리해 있다. 영화 속에서 보던 언덕은 찾기 어렵다.

루이지애나주의 광활한 농장은 500개 정도였으나, 지금은 20개 정도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그중에서 설탕 궁전이라 불리는 ‘후마스 하우스 플랜테이션’과 ‘오크 앨리 플랜테이션’을 방문했다. 특히 300년 된 웅장한 떡갈나무가 양옆으로 길을 따라 들어선 오크 앨리 플랜테이션은 스칼렛 오하라가 짝사랑했던 애슐리 윌크스의 ‘트웰브 오크스’ 농장을 연상시킬 만큼 인상적이었다.

후마스 하우스에 도착하니 멋진 드레스를 입은 가이드가 손님을 맞았다. 1828년 당시 34살이었던 소유주는 18살 어린 부인이 농장에 오래 머물기를 바라며 그리스풍으로 저택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부인은 정작 친정이 있는 뉴올리언스에서 훨씬 많이 머물렀단다.

루이지애나의 최대도시인 뉴올리언스에 비하면 이곳은 그야말로 시골. 노예제가 있었던 시절에는 더 무덥고 따분하고 무료했을 것이다. 온갖 집안일은 노예들이 했다. 농장주와 가족은 요리할 필요도, 청소할 필요도 없었다.

문화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혹시라도 외간 남자가 부인의 발목을 보면, 남편은 그 남자와 결투를 벌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 속 비비언 리가 허리를 졸라매며 파티에 갈 채비를 했던 장면도 유명하다. 목욕은 1주일에 한 번 하는데 부엌에서 물을 데워 온 가족이 한 명씩 교대로 같은 목욕물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교회 가기 전날인 토요일 밤에 말이다. 후마스 하우스 안에는 흥미로운 전시물이 많았다. 책상 위에는 비소, 모르핀, 아편 같은 마약이나 독극물들을 담은 유리통이 버젓이 놓여 있었다. 모르핀과 아편은 진통제로 상용됐다. 심지어 아이가 이를 갈 때도 먹였다. 부인들은 납과 비소를 섞어 피부를 희게 만들고 주름을 펴는 데 사용했다. 게다가 유리장 안에는 진짜 사람의 치아와 머리카락으로 만든 인형과 부두교에서 비롯된 마스크 및 흡혈귀를 쫓아내기 위한 십자가도 있었다.

후마스 하우스의 뒤편에는 나무로 만든 작은 오두막이 줄지어 있었다. 노예들의 숙소였던 곳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전혀 보여주지 않고 누락시킨 것들이다. 후마스 하우스에는 한때 2000명의 노예가 거주했고, 오크 앨리에는 100~200명의 노예가 살았다고 한다. 노예 한 명의 몸값이 대략 1000달러였는데 지금 시세로 2만6000달러(약 3000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후마스 하우스 내부에는 작은 화덕과 낡은 침대와 농기구들이 걸려 있었다. 노예들의 발을 채웠던 족쇄도 전시돼 있다. 족쇄를 만져 보니 차가운 냉기가 손끝까지 전해졌다. 노예들은 그 무거운 것을 발에 매달고 남부의 열기 속에서 목화솜을 따고 사탕수수를 베었을 것이다. 다른 벽을 보니, 노예들의 이름이 벽에 가득 적혀 있었다. 입속에서 그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뇌자니 코끝이 절로 찡해졌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와 <엉클 톰스 캐빈>의 톰 아저씨는 겨우 200m 정도 떨어진 한 울타리 안에 사는 이웃이었던 것이다.

예전 노예제가 있었던 미국 남부 지역은 영화처럼 로맨틱하고 웅장한 곳이 아니었다. 내겐 마치 성적 억압, 남녀유별, 미신, 마약을 뒤섞어 놓은 안개의 성처럼 느껴졌다. 남부의 유산은 지금 모두 사라지고 없다. 거대한 문명의 도래 앞에서 오히려 유산을 고수하려고 남북전쟁을 택한 사람들. 쇠락한 미국의 남부는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 현재의 교훈이기도 하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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