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역사 속에 늘 이야기를 들어 잘 아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잘 모르는 인물이 있다. 최근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는 사임당의 일대기 역시 그렇다. 사임당은 조선시대에 태어난 여성 가운데서는 아주 드물게 태어나고 죽은 날의 생몰년월일이 확실하다. 그는 1504년 10월29일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고 1551년 5월17일 47세의 일기로 서울 삼청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생몰년월일과 행적이 뚜렷하게 전해오는 인물인데도 어떤 문헌에도 사임당의 이름은 기록돼 있지 않다. 사임당이 세상을 떠난 다음 아들 율곡이 쓴 어머니의 행장에는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적는 것을 피하여(기휘라고 하여 임금과 부모와 조상의 이름을 문자로 쓰거나 입으로 부르는 것을 불경하게 여겨) ‘자당의 휘는 모(某)로 신공의 둘째 딸’이라고만 적었다. 만약 어머니 이름을 행장에 그대로 쓴다면 그것은 어머니에게 불효, 불경을 저지르는 일이 돼 사임당에 대한 여러 기록 속에 정작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책과 자료에 사임당의 본명이 신인선(申仁善)으로 나와 있는 것은 한 편의 코미디 같은 일이다. 1980년대 출간된 어떤 동화에 사임당의 어린 시절 이름을 ‘인선’이라고 쓴 다음부터 연이어 나온 책들이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고, 그러자 그것이 실제 이름인 것처럼 여기저기 자료에 인용되면서부터다. 학술적으로는 잘못된 인용이 거듭되다 보니 어떤 백과사전에까지 사임당 이름이 신인선으로 등재돼 일반인은 물론 텔레비전의 역사 교양 프로그램과 한국사 베스트셀러 저자까지도 거기에 나와 있는 오류를 정답처럼 그대로 베껴 방송하고 강의한다.
사임당이 한량인 남편을 대신해 그림을 그려 7남매의 생계를 책임졌다는 것도 옳지 않다. 도화서 화공들도 어진을 포함한 궁중행사 그림과 넉넉하게 값을 받고 고관대작들의 영정을 그려줄 때 말고는 색조물감을 함부로 쓰지 못하던 시절 사임당은 금가루보다 비싼 색조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결혼 전에도 그랬고 결혼 후에도 노비가 100명이 넘는 대갓집의 안주인이었다. 중인 계급의 도화서 화공도 아닌데, 그 시절 양반가의 규수가 그림을 그려 판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사임당이 대유학자 율곡의 어머니라는 점에서 마치 자식들의 성공을 다 지켜본 삶인 듯 닮고 싶어 하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사임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토록 뒷바라지한 남편은 과거시험 소과에도 오르지 못했다. 일곱 자식 가운데 혼기에 이른 자식이 넷이었는데 혼례를 치른 자식은 큰딸뿐이었다. 28세의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부증을 앓았고, 어머니가 죽은 다음 32세에 결혼했다. 어느 아들도 대과는 고사하고 소과시험에도 오르지 못했다. 셋째 아들이 13세 때 처음 과장에 나가 치른 진사시험 초시에서 장원한 것이 살아생전 자식들이 학문으로 보여준 결실의 모든 것이었다.
한쪽으로는 남녀가 한 우물의 물도 먹지 않던 시절을 배경으로도 너무도 당연하게 사임당의 자유연애 이야기를 그려야 그게 예술과 문학의 요건인 양 포장돼왔다. 그러나 그건 상상력의 발현이 아니라 그와 그 시대 속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상상력의 결핍이 가져온 상투적 꾸밈일 뿐이다. 드라마를 보더라도 그가 산 시대와 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보자.
이순원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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