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수목극 '김과장'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의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말이다. 법률 서류를 필사하는 바틀비는 고용주인 변호사에게 지시받을 때마다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고 반복한다. 이 모습은 소설이 발표된 1853년이나 지금이나 파격적이다. 권력과 자본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과 복종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주장하는 작지만 큰 저항이기 때문이다.
KBS 수목드라마 ‘김과장’의 주인공 김성룡(남궁민 분)은 어떤 면에서 바틀비의 21세기 현신(現身)이다. 김성룡은 원래 장부를 조작해 지방 조직폭력배의 탈세를 돕던 인물이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티큐그룹의 경리과장으로 입사한다. 그를 뽑은 이는 회계범죄 전담검사 출신 서율 이사(이준호 분). 자금력이 약화된 티큐그룹의 투자 유치를 위한 분식회계 용병으로 김성룡을 택했다.
김 과장은 ‘삥땅’(중간에서 돈을 가로채는 행위)할 기회만 주면 윗선 지시에 언제나 복종할 것이라 생각해온 인물이다. 그러다 뜻밖의 사건이 생긴다. 퇴근하던 중 빙판에 미끄러져 차에 치일 뻔한 전임 경리과장의 부인을 구한 것이다. 비리 내부고발자인 전임자의 부인을 구한 김 과장은 순식간에 주변으로부터 의인(義人)으로 추앙받는다.
이를 계기로 김 과장은 바뀐다. 티큐그룹 계열사인 티큐택배 노조 탄압을 막아선다. 사측이 보낸 ‘용역’들이 김 과장을 택배사 노조위원장으로 착각하고 그를 회유하기 위해 거액의 뇌물을 보내자 돈을 모두 회사에 다시 입금해버리기도 했다. 서 이사가 ‘비리 용병’으로 믿고 뽑은 김 과장이 권력의 무조건적 지시에 대해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 글러브 될 생각 없어?” 서 이사가 김 과장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제안하자 그는 답한다. “네. 저 글러브 싫고요. 이사님 4번 타자 하시고 저 9번 타자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 과장이 서로 같은 인간으로 동등하게 대우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샐러리맨의 삶은 흔히 톱니바퀴에 비유된다. 주체의식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자본이 원하는 방향에 반기를 들거나 도구로서의 가치가 소모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존재다. 드라마 속 회사원들끼리의 대화도 이를 보여준다. 티큐그룹 경리과의 윤하경 대리(남상미 분)는 “옳은 게 옳은 걸까요, 옳다고 여겨지는 게 옳은 걸까요?”라고 질문한다. 기러기 아빠인 추남호 부장(김원해 분)은 업무에 지친 표정으로 망설임 없이 답한다. “당연히 옳다고 여겨지는 게 옳은 거지. 그게 세상이니까. 옳은 게 옳다는 사고방식으로 살면 피곤해. 나만 바보 되고.”
작가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 세상, 미친 세상에 내가 먼저 미쳐야 이긴다”는 사람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당신은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는가?” 드라마가 택배회사 노조 이야기를 길게 풀어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배달하는 기계’로 취급돼온 택배 노조원들이 주장하는 것은 한 가지다. “우리도 같은 인간이다.” 택배원도 샐러리맨도 기계가 아니라 각자 생각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비리 용병’ 김 과장이 ‘휴머니스트’ 김 과장으로 환골탈태하는 과정이 이 드라마의 진정한 관전 포인트다.
이주영 < 방송칼럼니스트 darkblue888@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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