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의 데스크 시각]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

입력 2017-02-27 17:21  

조일훈 증권부장 jih@hankyung.com


야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상법 개정안은 독소 조항들로 가득하다. 기업 지배구조를 규율하고 있는 법령들 가운데 가장 폭압적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와 집중투표제는 대주주의 전횡을 견제한다는 취지를 벗어나 경영권 박탈, 또는 지배력 해체를 획책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공격이 늘어날 것이라는 경제계의 하소연은 먹히지 않는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잘해야지, 뭔 잔말이 그리 많아?”라는 힐난이 돌아올 뿐이다.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문재인 대선 주자(더불어민주당)는 ‘국가 대청소’를 위한 개혁대상으로 재벌을 지목했다. 비리·부패 공범자를 ‘청산’하고 그들이 축재한 부정 재산을 ‘몰수’하겠다고도 했다. 이렇게 살벌한 단어들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21세기 대한민국이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다. 정권을 잡고 나면 자신의 진영에 속하지 않은 쪽은 모조리 손을 보겠다는 으름장 같아서 으스스할 뿐이다.

시대착오적인 상법 개정안

아직은 한국이 이 정도 수준이다. 기업과 총수를 따로 떼어놓고 기업을 성장시킨 경영자의 공로는 짐짓 외면한다. “큰 기업은 시스템으로 돌아간다”고 하면서도 정작 그 시스템을 입안하고 실행한 총수의 역할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미 경영학계에선 정답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난 기업지배구조 문제를 놓고선 선거철마다 재벌개혁을 외친다. 언제나 목표는 재벌 해체다.

하지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변한다는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기업들의 흥망은 그야말로 촌각의 승부에 달렸다. 앞으로 10~20년쯤 지나면 많은 재벌그룹이 사라질 것이다. 경쟁력이 떨어지거나 내부 지배력이 약한 그룹은 제풀에 주저앉거나 해외에 팔려나갈지도 모른다. 혹여 과거 대우그룹처럼 굉음을 내며 쓰러지면 해당 기업 총수는 또 감옥에 갈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재벌들은 그렇게 사라져갈 것이다.

얼마 전 한 교수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다시 가난해질 것 같아요.” 상법 개정안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했더니 인터넷·모바일 공간에서 맹폭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이 서러워서가 아니라 나라의 앞날이 걱정이라고, 그래서 너무 답답하다고 했다. 그 말씀에 100% 공감했다.

한국 같은 나라 또 있을까

한국의 기업들은 강하다. 돈을 벌고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언론들이 온갖 걱정을 늘어놓아도 수출은 다시 살아나고 상장사들의 영업이익은 사상 최고 행진을 벌이고 있다.

이런 기업의 힘이 우리를 방심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위기를 견뎌내는 내성과 글로벌 시장을 휘젓는 돌파력이 연년세세 거듭될 것이라는 착각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삼성전자도, 현대자동차도 언제든 문을 닫을 수 있다. 나라도 망하는 판에 일개 기업이 영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한국처럼 등 뒤에서 찌르고 꼬집고 잡아당기면 생존능력은 급감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 싸우는 자국 기업들을 이토록 집요하게 괴롭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기업들이 망하면 명절 때마다 인천공항이 터져 나가도록 해외여행을 떠나는 시절도 끝장이 날 것이다.

한국은 도대체 얼마나 자신이 있길래 국가의 보물과도 같은 기업들을 이렇게 멋대로 주무르고 짓이기는 것일까.

조일훈 증권부장 ji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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