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현우 기자 ] ☞옆에서 소개한 사례는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의 책 ?원더랜드?(프런티어 펴냄·444쪽·1만6000원)를 발췌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혁신이 획기적 아이디어나 기술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놀이에서 비롯됐다고 소개한다. 패션, 쇼핑, 음악, 맛, 환영, 게임, 공공장소 등 여섯 가지 주제로 나눠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성이 상업화 시도와 신기술 개발, 시장 개척으로 이어진 다양한 사례를 담았다.
4만3000년 전 슬로베니아 북서쪽 변방 동굴에 살던 어린 곰 한 마리가 숨졌다. 그로부터 1000년 후 독일 남쪽 블라우강 숲속에서 매머드 한 마리가, 5000년 후에는 백조 한 마리가 숨졌다. 이들 생명체가 사후에 맞은 운명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남은 뼈가 인간의 손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피리’로 변신했다는 것. 지금도 연주가 가능할 만큼 잘 보존된 것도 있다.
수만년 전 인간이 음악에 눈뜬 이유는
음악과 관련된 기술의 역사는 생존을 위해 만든 옷이나 사냥 도구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훗날 학자들은 뼈에 뚫린 피리 구멍 사이의 간격이 완전 4도와 완전 5도 소리를 내도록 배치됐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4도와 5도는 현대음악에서 많이 쓰는 화음의 뼈대를 이룬다. 한 옥타브 차이는 주파수가 정확히 2 대 1인 음정을 만들어 청각에 생생한 울림을 남긴다.
음향이론의 기본도 몰랐을 초기 인간이 왜 악기를 만들었을까. 음악은 인간에게 쾌락을 준다. 설탕이나 아편이 뇌의 쾌락중추를 자극하는 방식은 간단하지만, 음악은 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자극한다. 인간은 이미 체험한 음악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을 계속 추구하게 된다. 뼈로 만든 인류 최초의 피리 소리가 고막을 울린 이후 인류는 새로운 소리, 색다른 소리를 낼 새로운 재료, 새로운 화음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런 노력을 통해 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기술적 진전이 이뤄졌다.
소리 내는 장난감이 천을 짜는 방직기로
《기발한 장치들이 수록된 책》을 쓴 이슬람 황금시대의 장난감 발명가 바누 무사는 ‘저절로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라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 악기는 수력으로 움직이는 오르간이다. 표면 전체에 핀이 무질서하게 돌출된 원통이 돌면 오르간의 파이프를 여닫는 레버가 움직이고, 공기가 파이프를 통과하며 핀이 배열된 패턴에 따라 다양한 음을 만들어냈다. 개방형으로 설계된 코드(code)로 작동하는 이 기계는 공학적 개념의 대약진이었으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분하게 된 시발점이 됐다.
“자동으로 소리를 내는 기계를 만들 수 있다면, 비슷한 원리로 견직물에 문양을 짜 넣을 수도 있지 않나.” 18세기 프랑스 발명가 자크 드 보캉송이 가진 의문이었다. 보캉송은 무사의 기술을 직물 제조에 응용한 기계를 만들었다. 핀이 돌출된 원통에 지시사항을 입력하면, 갈고리와 바늘이 움직이며 갖가지 색상의 실을 교차해 문양을 짜 넣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그래밍이 음악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게 된 순간이었다.
피아니스트의 손에서 타자기를 떠올리다
19세기 초 조제프 마리 자카르는 직물기계를 프로그래밍할 때 ‘구멍 뚫린 카드’를 사용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컴퓨터에 적용되는 2진법과 원리가 같다. 카드는 금속 원통보다 훨씬 만들기 쉽고 구현할 수 있는 문양도 다양했다. 전통 베틀은 기껏해야 하루 1인치만을 생산했지만, 자카르의 방직기는 날마다 2피트를 짜낼 수 있었다. 자카르 방직기는 오늘날 직물 생산 역사에서 중요한 혁신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고안한 펀치 카드는 20세기 후반까지 디지털 정보 입력장치로 긴 수명을 이어갔다.
컴퓨터를 쓸 때 없어선 안 되는 것이 쿼티 키보드다. 키보드의 키(key)는 음악에서 온 단어다. 인간의 소통 방식을 바꾼 키보드라는 아이디어 역시 음악에서 비롯됐다. 구텐베르크가 활자 체계를 다듬는 데 주력하던 시기, 유럽 전역의 악기 발명가들은 키보드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현악기 시제품을 실험하고 있었다. 1827년 프랑스 사서였던 베누아 고노는 피아니스트들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어 속기 타자기를 발명했다. 당시의 타자기를 보면 피아노처럼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이 뒤섞여 있다.
‘코드 기술’로 이어진 음악의 발전사
음악이 인류의 기술 발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인간의 다른 어떤 활동보다 ‘코드 생성’에 적합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코드화된 정보와 오락거리에 둘러싸여 산다. 영화, 가족사진, 비디오게임은 모두 2진법 코드로 변환돼 압축되고 저장장치에 담겨 유통된다. 악기가 밟아온 기술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녹음기술의 진화 과정이 엿보인다. 수동식 축음기는 진공관 증폭기로, 다시 디지털 CD로 대체됐다. 냅스터 같은 무료 음원공유 사이트는 지식재산권 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경제적 이슈를 파생시켰다.
음악은 최초로 부호화되고, 자동화되고, 프로그래밍되고, 디지털 상품화됐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려는 실험 욕구는 새로운 기술을 탄생시켰고, 그 기술은 음악 이외의 영역에 응용됐다.
정리=임현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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