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구단에서 입단 기자회견도 해주질 않네요. 어느새 제 위치는 그렇게 됐습니다.”
2009년 1월.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앞두고 미국 메이저리그(MLB)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입단한 박찬호는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셀프 입단식’을 가졌다. 필라델피아 구단이 박찬호의 입단식을 취소했기 때문이었다.
‘코리안 특급’에서 저니맨으로 달라진 위상을 씁쓸해 하던 박찬호는 “죄송하지만 이젠 현실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서 “그동안 국민들께서 보내주신 성원은 가슴 속에 담아두겠다”고 말했다.
선수 생활 은퇴도 아닌 국가대표 은퇴 기자회견. 유별나게 보일 수 있는 자리였지만 박찬호는 눈물을 쏟았다. 그는 ‘61’이 박힌 자신의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가리키며 “태극마크가 붙어 있다고 생각하며 뛰겠다”고 흐느꼈다. 성인이 된 이후 미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은 박찬호에게 국가대표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말해주는 눈물이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처음 국가대표가 된 박찬호는 메이저리거 출전이 허용된 2006년 1회 WBC에서 8년 만에 다시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한물 갔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묵묵히 4강을 이끌었다.
2007년 대만에서 열린 타이중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국가대표였다. 베이징올림픽 예선전이기도 했다. 당시 박찬호는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 재진입을 노리고 있었다. 불안한 입지 때문에 국가대표를 고사할 것이란 예상이 팽배했다.
하지만 박찬호는 대만행 비행기에 올랐다. ‘후배들과 올림픽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김병현은 “박찬호 선배 정도면 본선 진출이 확정된 이후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도 되는데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혀를 내둘렀다.
박찬호가 어떻게든 입으려 했던, 벗을 땐 눈물까지 보였던 대표팀 유니폼은 어느새 천덕꾸러기가 됐다.
대표팀은 이미 지난 대회부터 엔트리 구성에 난항을 겪었다. 시즌 준비를 이유로 선발을 마다하는 건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감독들도 지휘봉을 폭탄처럼 서로에게 미루다 이번에도 칠순을 넘긴 노감독의 등을 떠밀었다.
국가대표에 선발됐지만 대회에 맞춰 몸을 만들지 못해 그라운드를 밟지도 못한 선수들도 여럿이다. 그나마 선발 출장하는 선수들에게서도 투지가 실종된 듯한 모습이다. 한 야구팬은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란을 통해 “져서 화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에 화가 난다”고 지적했다.
실제 이번 대회에서 대표팀은 경기력 외에도 진지하지 않은 자세로 빈축을 샀다. 군인이 아님에도 애국가가 나올 때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를 하는가 하면 참패의 순간에 더그아웃에서 웃고 떠드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공격시 땅볼이나 병살성 타구가 나오면 포기하고 설렁설렁 뛰는 ‘라면 주루’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위로는 누구도 꺼내지 못했을 정도다. 삼진 하나마다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고 헬멧이 깨지도록 슬라이딩을 하던 대표팀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일각에선 프로야구의 타고투저 현상과 연봉 상승 문제를 거론하며 ‘배가 부른 우물 안 개구리가 됐다’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누구보다 답답한 사람은 후배들의 경기를 중계하던 박찬호다. 한국의 아웃카운트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그는 네덜란드전 직후 “어쩌면 이게 한국 야구의 수준”이라며 “한숨이 나오고 안타깝지만 더 좋은 야구를 팬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찬호가 말한 ‘더 좋은 야구’는 어렵지 않다. 이기는 야구가 아니다. 가슴에 태극기를 단 국가대표가 하는 야구, 지고도 박수 받을 수 있는 야구, 최선을 다하는 야구다.
전형진 한경닷컴 기자 withmol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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