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끝났다. 순식간에.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안방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정을 나흘 만에 마무리했다. 서울 고척스카이돔의 이름을 딴 ‘고척 참사’라는 말이 이번 대회에 대한 실망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야구계 안팎에선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다양한 원인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의 성과에 가려져 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꺼내는 분위기다. 위기의식을 느끼며 한국 야구의 현주소를 짚는다는 점에서 WBC의 ‘슬픈 성과’라면 성과다.
먼저 ‘야구 거품론’을 짊어지고 김인식 감독이 역사 속으로 퇴장하면서 대표팀을 이끌 전임감독제 논의가 다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야구계에선 그동안 긴 안목으로 대표팀을 운영할 전임감독제 도입 얘기가 나왔지만 번번이 좌초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대표팀 감독직을 고사하는 분위기에 칠순인 김 감독이 다시 ‘독이 든 성배’를 받았다.
그가 이룬 2006년 WBC 4강과 2009년 WBC 준우승의 성과는 후배 감독들에겐 ‘잘해도 본전, 못하면 욕 먹는’ 부담이었다. 하지만 김 감독은 대만전을 마친 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나보다 젊은 감독이 나올 수 있도록 야구계와 언론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대표팀을 맡을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꺼내던 ‘돌고돌아 김인식’ 카드는 이제 사라졌다.
김 감독이 역설했던 ‘좁은 스트라이크존’은 이번 대회를 통해 개정의 근거가 마련됐다. 프로야구의 좌우가 넓은 스트라이크존은 그동안 타고투저 현상의 주범으로 꼽혔다. 하지만 WBC에서 선수들이 위아래가 넓은 미국 메이저리그(MLB)식 스트라이크존에 고전하자 “차라리 리그의 스트라이크존을 세계의 추세(MLB식 스트라이크존)에 맞춰 국제대회에서 겪는 혼란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김풍기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위원장은 “야구 규칙이 정하는 선에서 스트라이크존을 최대한 넓게 볼 계획”이라면서 “사실 KBO리그 스트라이크존 규칙 자체는 MLB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WBC에서 높은 공에도 심판 손이 올라가던 장면을 당장 올 시즌부터 프로야구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
혼란이 예상되지만 이에 따라 ‘타격 인플레이션’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시즌 프로야구는 규정타석을 소화한 타자 55명 가운데 3할 타자가 40명, 리그 평균타율은 0.290였다. WBC 조별예선 2차전인 네덜란드전까지 19이닝에서 1득점 한 것을 두고 ‘우물 안 개구리’라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배부른 야구’라는 비난에 직면한 선수들에게 큰 자극이 됐을 전망이다.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한 베이스라도 더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모습이 사라졌다’는 질타를 받았다. 프로야구의 인기가 높아지고 선수들의 몸값이 오르면서 ‘배고프던 시절을 잊은 듯한’ 모습에 많은 야구팬들이 실망감을 나타냈다.
일본 스포츠매체 웹스포티바는 ‘한국 WBC 참패의 진상, 국내리그 융성이 일으킨 대표팀의 몰락’ 제하의 기사를 통해 “이전의 한국 야구는 져도 재미있는 야구였지만 이젠 그런 격렬함이 사라졌다”며 “좋은 대우를 받는 선수들이 늘어나면서 ‘국제대회에선 무리해서라도 열심히 하자’는 마음이 희미해졌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또 “세대교체와 유망주 육성 실패했고 기존 재능 있는 선수들의 투지 부족이란 악순환에 빠졌다”면서 “한국 야구가 피크를 경험한 이후 목표를 잃어버렸다”고 보도했다.
웹스포티바는 한국 야구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지금 세대는 (누구나 좋은 대우를 받는)버블 세대”라며 “‘필사적’이란 말은 이제 한국 야구의 대명사가 아니다”라고 전했다.
전형진 한경닷컴 기자 withmol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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