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주 꿰며 108배·숲길 1.5㎞ 삼보일배…"물소리도 선물 같았다"

입력 2017-03-13 18:10  

오대산 월정사 3박4일 '여성 출가학교' 가보니…

29세 기자부터 68세 주부까지…행자 18명 수행체험
속세의 '명함'과 집착 버리고 온전히 나를 찾는 시간
"나태하게 살아온 지난날의 반성과 후회 밀려와"



[ 고재연 기자 ]
“어느 회사의 직원,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 모두 던져버리고 법명(法名)으로만 살아보세요.”

지난 9일 오후 강원 평창 오대산 월정사 문수선원. 월정사 출가학교 학감인 적엄 스님의 말에 행자(行者) 18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막 짐을 풀고 3박4일간 ‘월정사 여성 출가학교’에 입학한 이들이다. 68세 할머니가 최고령, 29세인 기자는 최연소다. 나이와 직업은 달라도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의 때를 벗겨보려는 목적은 같았다. 스님이 말했다. “우리 마음은 탐진치(貪瞋癡·욕심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을 거울처럼 들여다보세요.”

◆마음을 비추는 ‘묵언’과 ‘하심’

월정사에 도착하자마자 소지품부터 검사했다. 휴대폰은 물론 화장품, 귀금속, 샴푸·린스까지 ‘반입 금지 물품’이다. 야반도주라도 할까봐 자동차 열쇠도 압수했다. 황토색 행자복으로 갈아입자 타인과 나의 구분이 사라졌다. ‘해심(海心)’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문수선원 교육장 입구에는 ‘묵언(默言)’과 ‘하심(下心)’이라는 두 글자가 걸려 있다. 말을 통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분출하는 속세(俗世)의 습관은 끊어야 한다. 대신 말없음과 육체적으로 고된 수행을 통해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의 마음을 살피게 한다. 지난겨울 30일간의 동계 출가학교를 졸업한 뒤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김윤경 씨(36)는 “묵언을 하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해왔는지 깨닫게 된다”고 귀띔했다.

입학식에 해당하는 고불식(告佛式)을 끝낸 뒤 자기소개 시간. 참가자들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불심(佛心)이 깊은 A씨는 “부처님에게 귀의하기 위한 ‘예행연습’으로 왔다”고 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B씨는 “종교는 없지만 휴대폰 없이, 밥 세 끼 꼬박꼬박 챙겨주는 곳에서 텅 빈 머리로 살아보자는 생각에 입교했다”고 털어놨다. 아이들이 결혼한 뒤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명예퇴직 후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기 위해 온 이도 있었다. 자리를 함께한 서현 스님이 말했다. “이곳에서는 타인의 행동엔 신경 쓰지 마세요. 자신의 화와 분노, 슬픔의 감정에만 집중하세요.”

◆번뇌(煩惱)를 담아 만드는 염주

저녁 예불을 마치고 문수선원으로 돌아왔다. 108배를 하며 염주를 만드는 시간. 한 번 절하고 염주 한 알을 꿴다. 서현 스님은 “구슬 하나하나에 자신의 번뇌를 담아 보라”고 했다. 구슬 하나에 나에게 고통과 고민을 안겨준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중에는 나와 인연이 닿았던 사람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렸다. 나를 괴롭게 한 사람보다는 고마운 사람이 더 많았다.

이튿날 새벽 3시50분. 스님이 목탁을 치며 만물을 깨우는 도량석 소리를 못 들은 탓일까. “기상하세요”라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적막감이 감도는 산사 하늘에는 아직도 별이 그득하다. 행자복을 입고 두 손을 모은 채 새벽 예불을 위해 줄을 맞춰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행자들의 모습이 하루 사이에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예불을 마치고 나오는 길, 신선한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삼보일배, 나를 내려놓는 시간

‘속세의 근심을 씻어내는 길.’ 월정사 입구 전나무 숲길을 이르는 말이다. 아침 공양을 마치자 이 숲길을 통과하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약 1.5㎞ 숲길을 오체투지(五體投地) 삼보일배로 간다. 무릎과 팔, 이마가 차례로 흙바닥에 닿는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큰 소리로 염불을 하며 목탁 소리에 맞춰 절을 하려니 발이 꼬이고 어색하다. 목소리가 작으면 ‘원위치’다. 눈이 채 녹지 않은 땅의 느낌이 만만찮게 차갑다. 무릎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고, 허리는 끊어질 것 같았다.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는 불교에서 왜 부처님을 부르고 절을 할까. 적엄 스님은 “이마와 가슴을 땅 가까이 내려 절하는 일은 오만과 편견, 자존심과 선입견을 내려놓는 과정”이라며 “내가 잘못 보고, 잘못 듣고 다른 이를 아프게 했던 것을 참회하고 더 이상 집착하지 않기로 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예배란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無明·어리석음)을 굴복시키는 것”이라는 ‘선가귀감(禪家龜鑑)’의 가르침 그대로다.

쌀쌀한 날씨에도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이마와 손, 무릎은 흙투성이가 됐다. 1시간 반쯤 지났을까. 드디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보인다. 낙오자는 없었다. 석탑 아래서 발원문을 읽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로 발원문을 읽는 목소리들이 흐트러진다. 조병애 씨(58)는 “나태하게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반성과 후회가 밀려왔다”며 “그래도 낙오하지 않고 이 길을 끝까지 걸어온 스스로가 대견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점심 공양을 마친 뒤 그 길을 다시 걸었다. 왼편에는 곧게 뻗은 초록빛 전나무가, 오른편에는 가지만 남은 물푸레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꽁꽁 얼었던 냇가에서 졸졸졸 물소리도 들려왔다. 모든 게 선물처럼 느껴졌다.

평창=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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