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봄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봄의 정취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은 남도의 섬들이다. 섬의 돌담 사이로 보드랗게 햇살이 내려앉았다. 봄이 오는 섬의 길들을 걷다 보면 돌담이 절묘한 여서도의 풍경이 보이고 유채꽃 일렁이는 관매도에 가고 싶어진다. 예술가의 손길이 닿아 있는 연홍도는 또 어떤가.
봄이 오는 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여서도와 관매도, 연홍도의 3색 풍경을 소개한다.
‘한국의 이스터 섬’ 여서도
한국 최고의 돌담 마을은 어디일까? 육지가 아니라 섬에 있다. 전남 완도군의 외딴 섬 여서도다. 10여년 전 필자는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에 빗대 여서도를 ‘한국의 이스터 섬’으로 이름 붙인 바 있다. 그 명칭은 아직도 유효하다. 높이 3m가 넘는 돌담이 즐비하고 온 마을이 돌담으로 이어진 거대한 성곽 같은 섬. 한때는 1000명이 넘게 살 정도로 번성했지만 현재는 80여명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그래도 빈집들의 돌담만은 여전하다.
여서도는 완도와 제주도 사이 큰 바다에 홀로 우뚝 솟아 있다. 주변에는 바람과 파도를 막아줄 무인도 하나 없다. 망망대해에서 섬사람들은 그 거센 풍파를 어찌 견디며 살았을까. 여서도 사람들이 바람의 침공으로부터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돌담 덕분이다. 근래 돌담이 지닌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해 등록문화재로 등록해 보호하는 곳이 많다. 그러나 문화재가 된 타 지역 돌담들은 대체로 돌아보는 데 30분이면 족할 정도로 짧다. 하지만 여서도는 돌담 탐방에 무려 3시간이나 걸릴 정도로 규모가 크다. 돌담은 여서도 기행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돌담 사이로 난 길들은 미로처럼 얽혀 있어 초행길이라면 길을 잃고 헤맬지도 모른다.
여서도는 단일 마을인데 마을 전체가 하나의 돌담으로 연결돼 있다. 집뿐만 아니라 밭들까지 모두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여서도는 바람이 워낙 강해 작물이 자라기 어렵다. 그래서 밭에까지 돌담을 쌓아 보호한 것이다. 또 집들은 대부분 가파른 비탈에 서 있는데 돌로 지은 돌집들도 많아 섬은 그 자체로 이 나라 돌 문명의 정수다. 더구나 돌담들은 보존을 위해 근래 쌓은 것이 아니다. 대부분 수백 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이다.
여서도에서는 7000년 전 선사시대 유적인 패총이 발견되기도 했고 민가 마당에도 고인돌이 남아 있을 정도로 사람이 살았던 역사가 길다. 하지만 조선시대 공도(空島) 정책으로 섬이 비워졌다가 1690년대 진주 강씨가 입도해 다시 마을을 이루며 살기 시작했다. 돌담도 섬의 역사와 함께했다. 돌담에 붙은 이끼 하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돌과 바람의 왕국 여서도. 숭숭 뚫리고 일견 허술한 듯 보이는 여서도 돌담들이 쓰러지지 않고 수백 년을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돌담 속에 바람과 맞서지 않고 바람과 공존하며 살아온 섬사람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돌담은 바람의 방어막이 아니다. 바람의 통로다. 섬사람들은 바람을 거스르고는 살 수 없어 바람이 지나갈 샛길을 만들어주고 바람과 함께 살아왔다. 수백 년 존재해온 여서도 돌담들이 단지 돌로 쌓은 구조물이 아니라 소중히 보존해야 할 섬의 역사이고 문화재인 것은 그 때문이다. 여서도 돌담은 가치가 커 문화재청에서도 문화재 등록을 시도했지만 무산된 전력이 있다. 근래에는 일부 주민의 도로 개설 요구로 돌담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기도 하다. 여서도 돌담들이 언제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지난겨울 필자와 여서도를 방문했던 오지 여행가도 여서도처럼 돌담 문명이 잘 보존돼 있는 곳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고 감탄을 연발했다. 또 어떤 개발의 바람이 돌담들을 파괴할지 모른다. 정부는 여서도 돌담을 서둘러 문화재로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마땅하다. 여서도 돌담은 더 꾸밀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매우 뛰어난 관광자원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까지 추진해도 손색이 없다. 돌담의 보존이 오히려 섬의 가치를 높이고 섬 주민에게도 큰 소득을 안겨줄 수 있다.
이 장엄한 여서도 돌담의 진면목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기는 겨울부터 봄까지다. 겨울에는 배가 뜨지 않는 날이 많은 까닭에 이 봄이 여서도 돌담 여행에 최고 적기다. 담쟁이 넝쿨들이 되살아나는 늦봄부터는 돌담들의 일부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여서도 돌담의 웅장한 자태를 보려면 지금 서둘러 떠나야 한다. 황금 어장으로 유명한 여서도 해산물은 덤이다.
봄섬 유채꽃의 향연, 관매도
한국 최고의 유채꽃밭은 어디 있을까? 유채로 유명한 제주도 아니면 남해도? 두 곳 다 아니다. 전남 진도의 작은 섬 관매도다. 관매도는 전라남도에서 가고 싶은 섬으로 지정해 섬이 보유한 자연과 문화 자원만으로 섬을 가꾸고 있다. 봄이면 관매도 관매 마을에서 장산평 마을 사이 3만여평의 들녘은 온통 유채꽃으로 물들어 더할 나위 없는 장관을 연출한다. 관매도 유채 꽃밭은 내내 꽃길만 가는 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해준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기도 한 관매도는 한국의 섬들 중에서 수위에 꼽힐 만큼 빼어난 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선녀와 하늘 장수 등 천계의 전설이 깃든 방아섬이나 돌묘와 꽁돌, 하늘다리 같은 풍광은 선경을 방불케 한다. 편안하고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트레일도 잘 닦여 있다. 방아섬 가는 길이나 하늘 다리 가는 길은 경사가 거의 없고 평탄해 체력이 약한 사람도 쉽게 산책하듯 거닐 수 있다. 약간 힘이 들긴 하지만 돈대산 등산도 권유할 만하다. 20여분만 경사로를 오르면 2시간의 산행길 내내 평탄한 능선이 이어지는 능선에서는 가슴이 탁 트이게 하는 다도해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돈대산에 올라서 보는 유채밭 풍경은 그야말로 인간세상이 아닌 듯하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관매도에는 또 하나 큰 보물이 있는데 관매도해수욕장 일대 소나무 숲이다. 면적이 9만9173㎡에 이르는 이 솔숲은 조선시대부터 방풍림으로 조성된 것으로 역사가 300년이 넘었다. 수령이 오래된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키도 크다. 일제 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무분별한 벌채로 좋은 숲들은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300년 넘은 솔숲이 이곳처럼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덕적도나 안면도 솔숲과 함께 서해안 3대 솔숲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관매도 솔숲에서는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세속에 찌든 때가 씻겨 나가고 몸이 맑아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관매도 솔숲은 2010년 ‘제1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인 생명상을 받기도 했다. 국립공원에 속한 많은 섬이 개발을 원해 국립공원 지구에서 빠져나가려 할 때 관매도는 자청해서 국립공원 지구에 남았다. 현명한 관매도 사람들이 섬의 자연 보존이 자신들의 가장 큰 자산임을 간파했던 것이다. 저물녘 솔숲 앞 너른 백사장에서 바라보는 석양 또한 일품이다.
관매도에 가면 꼭 맛봐야 할 토속 먹거리들도 있다. 관매도 할머니들이 해풍 쑥을 뜯어다 직접 빚은 쑥막걸리와 관매도 특산 톳을 넣고 만든 면 요리들이다. 민박집이나 식당에서 톳 칼국수나 톳 짜장을 맛볼 수 있다. 관매도에서는 긴 장대에 매달아 전통 방식으로 해풍에 말린 진짜 굴비도 만날 수 있다. 옛날 관매도에는 조기잡이 배가 많았다. 그래서 굴비를 만들어 먹는 풍습이 지금껏 남아 있다. 명절이나 제사 음식, 더러는 반찬거리로도 말린다. 운 좋거나 넉살 좋은 여행자라면 관매도산 진짜 굴비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예술 섬, 연홍도
전남 고흥의 연홍도는 면적 0.55㎢, 해안선 길이 4㎞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섬이다. 한때 폐교를 활용한 섬마을 미술관으로 유명해졌지만 볼라벤 태풍에 정원이 초토화돼 미술관은 오랫동안 휴관 중이었다. 그런데 연홍도가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사업을 통해 본격적인 예술 섬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예술 섬이다.
봄날 연홍도의 들녘에서는 아직도 소의 힘을 빌려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섬은 그 자체로 농업 박물관이다. 한때 김양식으로 명성을 떨치던 섬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135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52가구 82여명만 남았다. 연홍도의 원래 이름은 마도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연홍도로 바뀌었다. 마도란 섬의 형상이 말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홍도와 주변 해역에는 말머리, 말꼬리, 말풍경, 말붕알, 말먹이 등 말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산책로처럼 평탄한 4㎞의 섬 횡단 트레일을 따라 걸으며 말과 관련된 지명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이 길에서는 득량만과 여자만의 그림 같은 바다 풍경이 끝없이 펼쳐진다.
예술 섬 연홍도 마을 곳곳에는 60여점의 각종 작품이 전시돼 있다. 마을 입구에서 방문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연홍주민전’ 전시 작품인데 연홍도 주민의 옛날 모습을 담은 200여점의 사진이다. 선창가에 전시된 조각품 쌍둥이 소라는 연홍도의 상징물이다. 연홍도 마을 두 개의 메인 골목에는 해변 쓰레기들이 예술품으로 재탄생해 있다. 버려진 조개껍질과 부표, 로프, 폐목들을 활용한 정크 아트 부조 작품들 수십 점이 상설 전시 중이다.
작품들은 언제든 관람할 수 있지만 ‘지붕 없는 미술관 고흥’의 예술섬 연홍도가 정식으로 여는 날은 4월8일 오전 11시다. 이날은 1000개의 티셔츠가 장대에 매달려 바다를 향해 휘날리는 장관도 연출된다.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예술 섬. 꽃피는 봄날, 연홍이네 잔칫집 갈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요동을 친다.
강제윤 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facebook.com/jeyoon.kang.7 </a>>
여행정보
여서도로 가려면 완도항에서 가면 된다. 하루에 1회 배가 들어가며 3시간 걸린다. 운항요금은 3등석 기준 대인 8800원, 중고생 8000원, 소인 4200원. 신광해운(주) (061)244-2391 완도항여객터미널 1544-1114
관매도에 가려면 목포연안여객터미널에서 타면 된다. 섬사랑10호, 신해5호 1일 1회 운항한다. 7시간 걸린다. (주)해광운수 (061)533-4269
진도 팽목항에서는 한림페리3호 1일 1회 운항하며 1시간40분 걸린다. (주)에이치엘해운 (061)544-0833 조도고속훼리호 1일 3회 운항하며 1시간 걸린다. 서진도농협조도지점 (061)542-5383
연홍도로 가려면 금산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가면 된다. 오전 7시, 8시, 9시50분, 낮 12시30분, 오후 2시30분, 4시30분, 5시30분. 배를 타면 10분이 채 안 돼 연홍도에 도착한다.
세 섬으로 가는 여객선과 숙식정보는 island.haewoon.co.kr과 islands.jeonnam.go.kr에 자세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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