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은 논리적으로 두 가지 사실이 서로 대립돼 양립하지 못하는 경우를 나타낸다. 경제학에도 모순과 같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개념이 존재한다. 실업률과 물가(임금상승률)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 대사상가였던 한비(韓非)의 저서 ‘한비자(韓非子)’ 「난세편(難勢篇)」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전국시대 초(楚)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장에서 한 장사꾼이 창과 방패를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그가 창 하나를 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창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그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강력한 창입니다.” 그리고 방패를 집어 들고서는 “이 방패의 튼튼함은 천하제일로, 제아무리 날카로운 창으로 공격한다 하여도 다 막아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사꾼의 설명을 듣고 있던 한 구경꾼이 묻기를 “당신이 들고 있는 창과 방패가 훌륭한 것은 알겠소만, 그 창으로 그 방패를 내리치면 어떻게 될지가 궁금하구료”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구경꾼의 질문에 무릎을 치며 탄복하였고, 답변이 궁색해진 장사꾼은 물건을 챙겨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고 전해진다.
창과 방패를 뜻하는 한자어 ‘모순(矛盾)’이 오늘날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안 맞거나 이치에 어긋나는 상황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모순은 논리적으로 두 가지 사실이나 명제가 서로 대립돼 양립하지 못하는 경우를 나타낸다.
경제학에도 모순과 같이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개념이 존재한다. 실업률과 물가(임금상승률)가 바로 그것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필립스(A.W. Phillips)는 1958년 ‘이코노미카(Economica)’에 발표한 논문에서 임금상승률과 실업률 사이에 역(-)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임금상승률이 높았던 해에는 실업률이 상대적으로 낮았고, 임금상승률이 낮았던 해에는 반대로 실업률이 비교적 높았다는 사실을 역사적 통계에 근거해 증명한 것이다.
필립스의 주장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실업률이 높다는 것은 경기침체로 총수요가 줄어 노동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때 정부가 경기침체 완화를 위해 시중에 돈을 풀고 재정지출을 확대하면 이자율은 하락하고 기업의 투자는 증대된다. 기업의 투자가 늘면 생산이 증가해 고용 사정은 개선되지만, 기업은 그만큼의 임금상승 압박을 받게 된다. 결국 임금상승은 상품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져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결국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일련의 정책들이 물가 상승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실업률과 물가가 모순적인 관계라고 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필립스의 이론에 따르면 실업률과 물가는 어느 한쪽을 잡기 위해서는 다른 일방은 포기해야만 하는 양립불가의 대립적 개념인 셈이다.
이런 필립스의 주장은 이후 정책 입안자들에게 정책적 함의를 가져다줬다.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 중 어느 것을 우선시할지를 판단할 때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70년대 오일쇼크 과정에서 나타난 일련의 현상들은 필립스의 주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석유는 기업과 소비자에게 그 쓰임새가 다양한 없어서는 안 될 연료이다. 이런 까닭에 오일쇼크로 석유값이 오르자 생산비용과 물가가 동반상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물가가 상승해 소비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생산비마저 오르니 기업들은 긴축경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신규 채용은 고사하고 기존의 직원들마저 정리해야 할 판이었다. 실업률이 올라갔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물가가 상승하는 상황에서 실업률까지 상승하는, 다시 말해 실업률과 물가가 정(+)의 관계에 놓이는 필립스 이론에 역설적인 상황이 현실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필립스의 이론은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의 등장으로 인해 한계에 부딪혔고 그 주장의 힘을 서서히 잃게 됐다.
정원식 < KDI 전문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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