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을 기준으로 볼 때 이 땅은 중국인에게 어쩌면 낯설었다. 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 너머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험준한 산해관 밖, 즉 중국인의 표현대로라면 관외(關外) 지역이었던 까닭이다. 아울러 이곳부터는 관동(關東)으로도 불렸다.
산해관 동쪽 너머의 땅이라는 뜻에서다. 이곳에서 중국인의 지리 개념에서 흔히 등장하는 둥베이(東北)가 시작한다. 이 랴오닝, 인접한 지린(吉林), 북쪽의 헤이룽장(黑龍江)이 다 그 범주에 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만주(滿洲)라는 지명이 우선 익숙하다. 중원에 들어선 중국 왕조가 지닌 힘의 세기에 따라 이곳은 그 판도에 들었다가 또는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보자면 ‘만주’라는 지역 명칭이 아직도 이 땅의 정체성을 설명할 때 등장하듯 전통적인 중국인에게는 낯설고 물선 땅이었다.
만주, 백산흑수의 땅
이 지역의 자연환경을 이야기할 때 중국인들은 보통 白山黑水(백산흑수)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눈 덮인 하얀 산, 검은색 빛을 띠는 하천을 일컫는 말이다. 백설을 머리에 인 백두산에 헤이룽장 등 검은색 물빛의 하천을 지칭한다.
이역(異域)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 말이다. 그렇듯, 한때 만주로 자주 일컫던 지금 중국 동북 3성은 전통적인 중국인에게는 다소 거리가 있던 땅이다. 아울러 이곳은 만주족의 발상지다. 청(淸)나라를 세워 지금 중국의 거대한 판도를 만들어준 그 북방의 이민족 말이다. 고구려의 혼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청나라 만주족을 일으킨 누르하치의 조상인 여진(女眞), 중국을 한때 모질게 압박한 거란, 고구려 및 발해와 함께 만주를 경략한 말갈의 발길이 다 깃든 땅이다.
마지막에 이곳에 제 힘을 묻은 존재는 제국주의 일본이다. 이들은 이곳에 만주국(滿洲國)을 세워 제국의 음모를 키웠다. 중국인들은 그를 괴뢰국(傀儡國)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중국 대륙을 경략하려는 일본이 이 ‘괴뢰국’의 설립과 발전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점은 쉽게 부인할 수 없다.
어쨌거나 랴오닝은 중국인이 그런 만주를 서남쪽에서 들어설 때 접점에 해당한다. 이곳을 흐르는 랴오허(遼河) 일대가 영원히 평안하기를 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 지금의 遼寧(요령)이다. 지금 이 지역을 대표하는 글자는 그래서 ‘遼(랴오)’다.
19세기후반에 3000만명 이주
청나라를 세워 중국 전역을 손에 넣은 만주족의 발상지라 청대의 일반 중국인은 이 랴오닝을 좀체 넘어설 수 없었다. 만주족이 봉금(封禁) 구역으로 설정한 까닭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봉금은 풀렸다. 더구나 당시 인접한 산둥(山東)과 허베이(河北)에 대형 가뭄과 홍수가 이어졌다.
그곳 주민들은 봉금으로 땅이 비옥하고 물자가 풍부한 만주지역을 넘볼 수밖에 없었다. 그로써 대규모 이민(移民)이 벌어진다. 당시 이민자의 수는 300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야말로 세계적인 규모였다.
이들 이민 행렬이 처음 넘어선 곳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이다. 중국인들은 그 당시의 엄청난 행렬을 ‘관동지역으로 들이닥쳤다’는 뜻의 闖關東(촹관둥)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원래 있던 만주족의 자취는 거의 사라지고 산둥과 허베이 등에서 몰려든 이민이 새로 개척한 땅이 옛 만주, 그 접점에 있던 곳이 바로 랴오닝이다. 괴뢰국을 운영하던 일본이 야심차게 진행한 공업화, 그에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지원이 덧붙여지면서 새 중국 건국 뒤 이곳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발달한 공업지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설비가 노후화해 가장 시급하게 구조조정이 이뤄져야 할 곳이다.
4200여만 인구에 이민사회 특유의 강인함으로 도약과 성장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 인조(仁祖)의 무릎을 꿇게 한 그 아들 홍타이지, 청나라 치세(治世)를 이끈 홍타이지의 이복동생 도르곤 등을 배출했다. 다양한 힘이 격돌했던 옛 싸움터, 古戰場(고전장)의 이미지와 함께 병자호란 때 인질로 끌려와 머물던 조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자취도 있어 우리로 하여금 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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