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의식, 노사 제쳐 두고 합의…기업 추가 부담·근로자 임금 감소
정년 연장 혼란 사태와 '판박이'
중소기업중앙회 "유예기간 더 달라"
기업·근로자에 부담 떠안긴 '표퓰리즘'
[ 최종석 기자 ] 더불어민주당 등 원내교섭단체 4당은 지난 2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법안심사소위에서 근로시간 단축에 합의했다. 23일 소위를 열어 처리한다. ‘근로시간 단축 법안’이 소위와 상임위원회를 통과하면 대선 정국에서 브레이크 없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다.
법안의 뼈대는 연장근로를 포함해 근로시간을 현행 주당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시행은 내년부터 하되 300인 이상 고용 기업은 근로시간 규정을 어겼을 때 형사처벌(민사책임은 발생)을 2년간 유예하고, 300인 미만 기업은 4년간 유예한다는 단서만 붙었다.
근로시간 단축은 대선주자들의 단골 공약이다. ‘근로시간 줄여 일자리 50만개 창출’(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후보도 있다. 한국인의 연간 근로시간은 2113시간(2015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인 멕시코(2246시간)에 이어 2위다. 근로시간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방향성에는 이론이 많지 않다.
하지만 현장에서 근로시간 단축은 ‘뜨거운 감자’다. 기업이나 근로자 모두에게 그렇다. 기업은 추가 고용을 해야 해 인건비 부담이 커진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줄어든 임금을 보전해 달라는 노조의 요구도 거세질 전망이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기업의 인건비 추가 부담이 12조3000억원에 달할 것이란 추산(한국경제연구원)도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21일 급격한 기업 부담을 줄이고, 휴일·연장근로에 추가로 임금을 주는 할증률을 재조정하는 등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이유다. 중소기업중앙회도 기업 규모에 따라 2024년까지 단계적 시행을 주문했다.
근로자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근로시간 단축은 곧 초과 근무수당(연장·휴일근로 시 최소 50% 할증) 감소로 연결된다.
월급봉투가 얇아진다는 얘기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임금 감축 없는 근로시간 단축’을 약속했지만 뚜렷한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근로시간 단축의 궁극적 목표는 ‘삶의 질 제고’다. 원만한 노사 합의를 거쳐 생산성을 향상시킴으로써 근로시간을 줄이고 소득은 감소하지 않게 해야 한다. 하지만 표(票)만 쳐다보고 있는 정치권이 근로시간 단축에 덜컥 합의하면서 산업현장은 떨고 있다. 마치 2013년 ‘정년 60세법’ 국회 통과 때와 판박이다. 임금피크제가 빠진 정년연장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기업은 인건비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었고, 일자리를 둘러싼 청년층과 중장년층 간 갈등은 더 커졌다.
산업현장에선 근로시간과 동전의 앞뒷면 관계인 임금 갈등도 증폭되고 있다. 통상임금을 둘러싼 혼선은 2013년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전혀 가시지 않고 있다. 휴일근로와 연장근로 때 임금을 중복 할증할 것인지 여부는 대법원에만 14건이 계류 중이다.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려고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노동개혁 5법 안에 넣고 2015년 9·15 노·사·정 대타협까지 이끌어내며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노사 및 여야 대립으로 좌초한 상황이다.
정치권은 노동시장 구조 개선과 근로자 복지 향상에 필요한 여러 법안 가운데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카드 하나만 빼 들었다. 임금 감소와 추가 고용 등의 부담은 고스란히 노사가 떠안게 됐다. 정년 60세법의 되돌이표가 되지 않으려면 보완책을 함께 내놔야 한다. 초과근로 할증률이나 노사가 임금협약 등으로 대비할 수 있게 하는 유예기간도 각계 의견을 수렴해 다시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이나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상대방에게만 미룰 뿐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다. 이런 탓에 정치권 일각에선 근로시간 단축이 전형적인 ‘시늉 정치’라는 분석도 나온다. 근로시간 단축이 아니라 다른 당에 입법 무산의 책임을 전가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 정책과 사법부 판단의 토대가 되는 법안을 마련해야 하는 정치권은 지금 포퓰리즘으로 국민과 기업에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최종석 노동전문위원 js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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