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펀드로 분할 등 근본적 개편 필요
대우조선해양이 심각한 자금난에 빠지면서 불똥이 국민연금으로 번졌다. 만기가 남은 대우조선 회사채 1조3500억원의 29%인 3900억원을 국민연금이 보유 중이어서다. 정부는 이들 회사채의 50%를 출자전환하고, 50%를 만기연장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결국 회사채 최다보유자인 국민연금이 대우조선 회생의 열쇠를 쥔 형국이다. 국민연금이 반대하면 자율적 채무재조정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부담을 떠안은 국민연금은 산업은행 측의 회동 요청을 수차례 거절하며 우왕좌왕하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학습효과로 극도의 몸사리기에 들어가 만남 자체를 꺼린다는 분석이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찬성이 정당하다는 주장이 특검에 의해 너무도 간단히 부정되고 말았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수뇌부의 구속과 몇 번인지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의 압수수색은 트라우마일 수밖에 없다.
대우조선 추가지원도 다를 것이란 보장이 없다. 추가지원을 둘러싼 논란이 커 사후 책임추궁이 뒤따르고, 범죄자로 몰릴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조선업황에서부터 부도 시 피해규모까지 온통 불투명하다.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방식에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번 대우조선 사태가 아니더라도 국민연금을 둘러싼 갈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근자에만 해도 SK(주)-SK C&C 합병,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이사선임의 건 등에서 국민연금의 선택이 반발을 불렀다.
이것저것 다 귀찮으니 앞으로는 의결권자문사로 떠넘기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이는 신중치 못한 처사다. 의결권자문사들의 태반은 ‘주주행동주의’라는 철 지난 사고에 입각해 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정에서 세계 1, 2위 의결권자문사가 ‘합병 반대’를 권고한 데서 잘 드러난다. 기업이나 국민경제적 이익을 외면하고 투기자본 엘리엇펀드를 의도적으로 편든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뒷맛은 개운하지 못하다.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민간기구에 결정을 떠넘기는 데도 신중해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앞세우지만 지금까지 ‘의결권 행사전문위원회’의 결정을 보면 근거없는 반(反)대기업 정서에 집착하는 행태가 관찰된다. 면책을 위해 책임없는 집단에 결정을 미루는 일이야말로 무책임의 전형일 뿐이다.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는 마땅히 ‘섀도 보팅’이 돼야 한다. 여타 주주의 찬반 비율대로 지분을 배분하는 중립적 의결권 행사방식이다. 국민의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 없이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단기성과급을 노린 연금 펀드매니저들의 사적 동기가 작용하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힘들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국민연금의 본질에 있다. 국민연금은 한국 증시에서 ‘연못 속의 고래’가 된 지 오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5% 이상 대량지분을 보유한 상장사 수는 지난 2일 기준 285개사로 최근 5년 사이에 29%나 늘었다. 10%를 넘는 상장사도 76개에 달한다. 보유한 대기업 주식 상당수가 지분율이 너무 높아 더 사기도 부담스럽다. 그렇지만 일정 수준의 유동성을 갖춘 주식을 찾다보니 대기업 주식만 사들이는 양상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덩치가 커지고 국내 증시에서 비중이 높아질수록 수익률 올리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대안으로 해외투자나 대체투자를 늘리자는 주장이 있지만 이 또한 적잖은 문제가 있다.
국민연금은 일종의 강제 보험이다. 그런데 이렇게 걷은 돈으로 해외주식 투자를 늘리면 국내 투자는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고 디플레 압력도 생긴다. 국민연금은 이미 적립액의 15.3%를 해외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해외빌딩 투자 같은 대체투자는 위험도 큰 데다 유동성도 떨어진다. 2040년이면 국민연금에서 순 현금 유출이 예상되는데, 유동성 낮은 자산을 늘리는 것은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국민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만든 자금으로 후손들의 미래를 위협한다는 비난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공사화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역시 쉬운 얘기가 아니다. 향후 최대 2000조원도 넘어설 연금을 공사화할 경우 수익성 확보는 더욱 어려워지고 운용을 둘러싸고 정치권 등의 엄청난 압력에 직면할 게 뻔하다. 결국 공사화보다는 국민연금을 소규모 펀드로 분할하든지 가입자들이 자율적으로 운용사를 선택하는 등의 체제로 바꾸는 방안 등을 검토할 필요가 크다. 이대로 방치하다간 경제 전체에 엄청난 부담이 되는 것은 물론 국민들의 노후도 위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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