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와이너리를 찾아서…100년 전 서부개척 기차에 오르다
[ 최병일 기자 ]
카우보이, 컨트리 음악, 바비큐 등을 떠올리게 하던 댈러스가 감성 충만한 도시로 거듭났다.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 불리는 예술특구가 들어섰고, 스카이라인은 더욱 화려해졌다. 댈러스 옆 포트워스에선 말을 타고 뿔이 긴 소인 롱혼 소 떼를 모는 카우보이를 만나게 된다. 포트워스에서 낡은 기차를 타고 가는 그레이프바인에서는 ‘메이드 인 텍사스’ 와인을 맛볼 수 있다. 댈러스는 과거와 현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다양한 매력을 뿜어낸다.
낮에는 예술의 향기 가득한 도시
“카우보이의 수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장의 인사말을 들으며 댈러스·포트워스국제공항에 착륙할 때만 해도 카우보이들이 활보하는 거리를 떠올렸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댈러스 거리는 고층 빌딩이 가득했다. 360도 파노라믹 뷰로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리유니언 빌딩, 지오덱 전망대에 서자 댈러스는 현대적인 도시라는 게 확실해졌다. 동그란 구 모양의 전망대를 한 바퀴 빙 돌아보는 동안 시야를 채운 것은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비된 거리와 마천루, 그리고 기차가 끊임없이 오가는 철로였다.
댈러스는 1870년대 중반, 철도가 들어오면서부터 남·서부 교통의 중심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교통이 좋아 다양한 컨벤션이 열리는 비즈니스 허브로 자리 잡았다. AT&T와 아메리칸항공 등 여러 회사가 댈러스에 본사를 두고 있다. 19세기 초 소 떼를 몰고 와 댈러스를 개척한 카우보이의 흔적은 파이어니어 광장(Pioneer Plaza)에서나 볼 수 있다. 옛 철로와 창고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한 파이어니어 광장에는 3명의 카우보이가 70마리의 소 떼를 몰고 언덕을 넘고 강을 건너는 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다. 제목은 ‘캐틀 드라이브(Cattle Drive·소몰이)’. 텍사스 출신 조각가 로버트 서머스(Robert Summers)의 작품으로 실물보다 크게 만들어 멀리서 봐도 거대하고 역동적이다.
카우보이의 후예들은 댈러스를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변신시켰다. ‘빅 사이즈’를 좋아하는 댈러스 사람들답게 거대한 ‘댈러스 예술 특구’를 구축했다. 그 안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공연장과 미술관이 가득하다. 기원전 3000년 이전부터 현재까지 2만2000여개 작품을 전시하고 있어 ‘미술백과사전’이라 불리는 댈러스 미술관이나 근·현대 조각품 컬렉션이 풍성한 내셔 조각 센터에선 미술 전집 속을 거니는 기분마저 든다. 공연에 관심 있다면 최고의 음향시설을 갖춘 AT&T 아트홀이나 와일리 극장의 프로그램을 눈여겨볼 만하다. 조각 작품과의 만남은 댈러스 수목원에서도 이어졌다. 화이트 록(White Rock) 강의 동쪽에 있는 댈러스 수목원은 세계 10대 정원으로 꼽힐 만큼 거대하다. 색색의 꽃이 만발한 정원 곳곳에 소설가 마크 트웨인, 화가 모네, 벤저민 프랭클린 등 유명인의 조각상을 곳곳에 배치해 놓았다. 댈러스 수목원 관람의 하이라이트는 호수 옆 정원으로 조각과 호수가 그림처럼 어우러진다.
밤이면 라이브 음악의 도시로 변신
댈러스에 머무는 동안 저녁 식사 때마다 라이브 음악 소리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컨트리 음악과 지역 맥주를 즐길 수 있는 펍이 곳곳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댈러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는 곳은 ‘더 루스틱(The Rustic)’이다. 컨트리 음악 가수 팻 그린(Pat Green)이 운영하는 펍으로 싱그러운 뒤뜰에 앉아 매일 저녁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에 흠뻑 취할 수 있다. 나무 그늘 아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맥주로 한낮의 열기를 식히면 음악축제에 온 기분마저 든다. 숭덩숭덩 썬 아보카도에 오이와 멕시코 감자인 얌빈을 버무린 샐러드, 식감이 독특한 선인장 튀김 등 “여기, 맥주 한 잔 더!”를 외치게 하는 메뉴가 다양하다.
인디 밴드들의 라이브 음악을 즐기고 싶다면 딥 엘럼(Deep Ellum)으로 가도 좋다. 1900년대 초 블루스 음악가들의 근거지였던 딥 엘럼은 세월이 흘러 재즈부터 얼터너티브 랩까지 젊은 음악가가 모여드는 거리가 됐다. 댈러스의 청춘들은 자전거를 타고 삼삼오오 몰려와 맥주를 홀짝이며 밴드 음악에 몸을 맡긴다. 딥 엘럼에서 뜨는 수제 맥주 펍은 브레인데드 브루잉(Braindead Brewing)이다. 끝내주는 맥주를 만들겠다고 의기투합한 세 친구가 일군 양조장 겸 펍으로 25개가 넘는 수제 맥주와 햄버거, 타코 등을 맛볼 수 있다.
포트워스에는 진짜 카우보이가 산다
“진짜 카우보이를 보고 싶으면 포트워스로 가야죠!” 포트워스는 1870년대 중반 철도 개통으로 가축거래소가 번창하며 소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그 시절 소와 함께 카우보이들이 포트워스 스톡야드로 몰려들었고, 지금도 카우보이 문화가 짙게 남아 있다.
옛 가축거래소는 포트워스 스톡야드 박물관이 돼 여행객들을 반긴다. 박물관 옆 로데오 경기장에선 매주 로데오가 열린다. 거리의 상점들도 웨스턴 부츠 가게, 카우보이모자 가게, 웨스턴 바 등 온통 카우보이를 테마로 하고 있다. 게다가 포트워스 스톡야드 박물관 앞거리에선 하루 두 번 카우보이들의 소몰이 쇼, 캐틀 드라이브(cattle drive)도 펼쳐진다. 말을 탄 카우보이들이 개선 장군처럼 당당하게 소 떼를 몰고 지나가는 모습이 마치 서부영화의 한 장면 같다. 카우보이들이 모는 소는 뿔이 길어 ‘롱혼(Longhorn)’이라 불린다. 사납게 생긴 외모와 달리 느릿느릿 행진하는 것이 롱혼의 반전 매력이다.
캐틀 드라이브 구경꾼 중에 맥주병을 든 이를 발견했다. ‘버펄로 벗(Bufflo Butt)’이라는 이름의 맥주였다. 미국에선 길거리에서 음주가 불법이지만 포트워스에서만 합법이다. 포트워스 거리를 활보하며 마시는 버펄로 엉덩이 맥주라니, 그 맛이 궁금해졌다. 물어 물어 그 맥주를 가장 먼저 팔기 시작했다는 웨스턴 펍, 에이치스리(H3)로 갔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는 스윙도어를 벌컥 열고 들어서자 카우보이모자를 쓴 할아버지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심지어 벽에 버펄로 엉덩이가 걸려 있고, 바 의자의 일부는 말안장으로 돼 있는 게 아닌가. 안장 위에 앉아 호박색 엠어 에일, 버펄로 벗 맥주를 마시니 유난히 상쾌했다. 서부 개척시대 유목민처럼 떠돌던 카우보이들이 맥주로 목을 축이는 기분도 꼭 이랬을 것 같았다.
포트워스에서 맛봐야 할 건 버펄로 벗 맥주만이 아니다. 거대한 화덕에서 메스키트 나무로 만든 숯(mesquite coal)으로 훈연하는 정통 텍사스 스타일 바비큐를 빼놓으면 아쉽다. 쿠퍼스 올드타임 바비큐(Coopers Old Time BBQ)는 소고기 양지 부위를 저온에서 10시간 이상 조리한 ‘비프브리스킷’이 야들야들하기로 유명하다. 약한 불에서 장시간 익히는 동안 고기의 콜라겐이 젤라틴화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진다. 여기에 2인치 두께의 폭찹, 치즈나 할라피뇨가 콕콕 박힌 소시지, 콘슬로 등을 곁들이며 금상첨화다. 특제 바비큐 소스에 푹 찍어 먹으면 더 맛있다.
카우보이의 후예가 만든 와인 맛은?
댈러스와 포트워스 사이의 소도시, ‘그레이프바인(Grapevine)’은 이름에서부터 와인향이 솔솔 난다. 100년 전 서부개척시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리에 소규모 와이너리만 10곳이 넘는다. 포트워스 스톡야드에서 빈티지 기차를 타고 와서 글로켄슈필 시계탑, 타운 스퀘어의 흰 정자 등 옛 거리를 구경한 뒤 와인 시음을 하고 가기 그만이다. 그레이프바인 빈티지철도는 실제로 서부시대에 달리던 증기기관차를 개조한 관광열차다.
그레이프바인에 와인 바람을 불어넣은 주역은 1996년 문을 연 ‘델라니 바인야즈(Delaney Vineyards)’다. 이후 와이너리가 하나둘 생겨났다. 텍사스와인 & 포도생산협회(Texas Wine & Grape Growers Association)도 그레이프바인에 둥지를 틀었다. 여기에 매년 10월 중순마다 와인 축제 ‘그레이프페스트(Grapefest)’가 열리며 와인 불모지에서 시음 천국으로 발전했다. 단 이곳엔 포도 넝쿨이 물결치는 푸른 언덕은 거의 없다. 대부분 와이너리는 다양한 품종의 포도를 매입해 와인을 만든다. 그중 가장 다양한 와인을 선보이는 곳은 ‘메시나 호프 그레이프바인 와이너리(Messina Hof Grapevine Winery)’다.
19세기풍 윌리스호텔 1층에 자리한 ‘메시나 호프 그레이프바인 와이너리’가 문을 열자 매니저 아만다가 반겼다. 그녀가 건네준 와인 리스트에는 무려 46가지가 쓰여 있었고 그중 다섯 가지를 시음할 수 있다고 했다. 첫 잔은 주로 프랑스 동부 알자스 지방 포도 품종으로 만드는 화이트 와인인 게뷔르츠트라미너를 택했다. 입 안 가득 번지는 게뷔르츠트라미너의 꽃향기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르나슈와 시라 등을 블렌딩한 GSM, 말벡, 프리미티 등 레드 와인을 맛봤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훌륭한 맛은 아니지만, 그 안에 깃든 와인을 만든 이의 마음이 느껴졌다.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전통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다양한 와인을 만들어내는 도전정신이.
댈러스=우지경 여행작가 traveletter@naver.com
▶▶여행정보
인천국제공항에서 댈러스·포트워스국제공항까지는 아메리칸항공(American Airlines)과 대한항공이 매일 직항을 운항한다. 아메리칸항공은 올 2월 이 노선의 보잉 787-9 드림라이너 기종에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도 갖췄다. 인천에서 댈러스·포트워스공항까지는 약 13시간 걸린다. 시차는 한국보다 15시간 느리다. 서머타임에는 14시간 시차가 난다. 댈러스에서는 면세쇼핑도 할 수 있다. 한 매장에서 산 물품의 세금이 12달러 이상이면 환급받을 수 있으며, 쇼핑몰 내의 면세 카운터나 공항에서 구매한 물품과 영수증, 여권을 제시하면 된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