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제2의 터먼 리포트

입력 2017-04-09 18:02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대전 유성구 KAIST 창의학습관 1층엔 터먼홀(Terman Hall)이 있다. 프레데릭 터먼(1900~1982) 전 미국 스탠퍼드대 부총장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강당이다. 이곳 한편엔 업적과 그의 얼굴 부조(浮彫)가 설치돼 있다. 터먼은 한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미국이 1970년 파견한 과학기술 고등교육 자문단장이었다. KAIST 설립 청사진이자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토대가 된 ‘터먼 리포트’를 작성했다.

미국에도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다. 스탠퍼드대 터먼 엔지니어링 빌딩이다. 이 빌딩 내 공대 도서관 입구 벽면엔 역대 학장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스탠퍼드대는 터먼의 사진을 다른 학장과 별도로 게시할 정도로 특별 예우한다.

터먼은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린다. 1965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전기공학과 학과장, 공과대 학장. 부총장 등을 두루 거치며 서부 신생 사립대였던 스탠퍼드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견인하는 데 기여했다. 상아탑에 갇힌 교수와 학생들에게 산학협력과 창업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의 조언과 후원으로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휴렛팩커드(HP)를 창업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KAIST 학교사(史)는 “(학교) 청사진을 그린 터먼 박사의 조언 등에 따라 맥주발효법, 엔진 부품 개발 등 실용 연구에 집중했다. (중략) 교수와 학생들은 도서관 대신 실험실에서 땀과 기름에 범벅돼 뒹굴었다”고 썼다. 터먼이 이끈 조사단 일원으로 리포트 작성을 주도했던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당시 브루클린공과대 교수)은 “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과학발전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정 전 장관은 ‘나의 선생님 터먼 박사’란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칠십이 넘은 노교수는 한국 과학기술계 지도자들을 만날 때마다 집요하게 질문을 하고, 그 내용을 일일이 노트에 깨알같이 기록했다. 장마 뒤 찌는 더위 속에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다하는 박사의 열정에 완전히 매료됐다.”

새로운 도약을 고민하는 KAIST가 ‘제2의 터먼 리포트’를 낸다고 한다. 지난 3월 취임한 신성철 총장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터먼 리포트가 산업화 시대에 맞는 인재를 키웠다면, 이제는 제4차 산업혁명기에 필요한 지속가능한 능력을 창출하기 위해 ‘제2의 터먼 리포트’를 만들겠다”고 했다. 내용은 달라져도 KAIST를 글로벌 대학으로 이끄는 데 기여한 터먼의 열정과 위험을 무릅쓴 도전정신만은 리포트에 다시 담기길 기대해 본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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