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하청 뿐만 아니라 재하청업체 근로자까지 정규직으로 뽑으라니"
제조업 파견 근로 허용 않으면 중소기업도 근로자도 모두 손해
법원이 업무 특성을 따지지 않고 ‘제조업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판결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현장의 혼란이 확산되고 있다. 직접 계약 당사자가 아닌 재하청업체의 근로자까지 원청의 직원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까지 나왔다.
사내하청은 파견이 금지된 한국의 노동법제 하에서 제조업체들이 노동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독일, 일본, 미국 등 제조업 경쟁국 가운데 파견을 금지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제노동기구(ILO) 협약도 ‘원칙 허용, 남용 금지’다.
기업들은 “법원의 노동계 편향적 판결로 사내하청마저 막히면 파견과 하청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해외 경쟁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파견 금지된 제조업의 대안, 사내하청
지난 2월 서울고등법원은 근로 현장에 큰 파장을 준 판결을 내놨다. 현대자동차의 사내하청업체 직원들이 제기한 근로자 지위확인소송 사건에서다. 근로자 지위확인소송은 원고가 법원에 원청(현대차)의 정규직임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하는 소송이다. 원고가 승소하면 신분이 바뀌는 것은 물론, 그동안 원청 정규직으로 일했으면 받을 수 있었던 임금도 소급해서 받게 된다.
하청업체 직원들이 이런 소송을 제기한 근거는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에 있다. 파견법은 경비, 청소 등 32개 업종에만 파견근로를 허용한다. 제조업 등 다른 산업에서 파견근로를 쓰면 그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업무’는 파견근로를 쓸 수 없도록 직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다수 제조업체들이 경기 변동 대응 수단으로 파견 대신 사내하청을 주로 활용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300명 이상 제조업체의 41.2%(2010년 기준)가 사내하도급을 활용한다.
근로기준법 상 해고가 엄격히 제한되기 때문에 국내에선 기업의 실적이 나빠지거나 개인 성과가 나쁘다고 해서 사람을 내보내기가 쉽지 않다. 특히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는 생산직 근로자는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사업장 내 일정한 일감을 하청업체에 통째로 맡기는 방식의 사내하청을 쓴다.
파견과 사내하청의 차이는 원청이 파견업체(하청업체) 직원의 근로감독을 하느냐, 아니면 파견업체가 근로감독을 하느냐다. 대법원은 △원청이 업무수행에 지휘·명령을 하는가 △하청업체가 원청에 실질적으로 편입돼 있는가 △하청업체 사업주가 근무관리 권한을 행사하는가 △원청과 하청의 업무가 구별되는가 △수급업체의 독립된 기업조직·설비를 갖고 있는가 등의 요소를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법리를 제시했다.
문제는 실제 현장에서 파견과 사내하청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실질적 판단’이 문제가 된다. 각 공장과 공정, 개개인의 작업 내용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비슷한 일을 하더라도 재판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도 똑같이 승소하는 경우도 많다.
◆제조업 사내하청마저 제한하는 법원
서울고법은 이 소송에서 직접 생산공정의 근로자들 뿐 아니라 부품 배송(생산관리), 출고 차량 점검·포장 등 이른바 ‘간접 공정’ 근로자들도 전원 현대차의 정직원으로 인정했다. 공장이 아닌 연구소에서 시제품을 제작하는 하청업체 직원도 정직원이라고 봤다.
특히 현장에서 ‘서열화’라고 부르는 생산관리에서 다양한 파트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업무에 상관없이 모두 정규직이라는 판단을 받았다. 서열화는 납품업체들이 자동차에 들어가는 수많은 부품들을 보내오면 그 부품들을 분류하고, 공장 내 각각의 공정에 맞게 순서대로 보내주는 업무다.
서열화는 공장 밖에서 작업할 때도 있고, 안에서 작업할 때도 있다. 서울고법은 사업장 밖에서 서열화 업무를 하더라도 공장 안에서와 비슷한 일을 한다는 이유로 원청의 정규직으로 인정했다.
또 현대차에게 서열화 업무를 하청받은 기업이 다른 업체들에게 재하청을 준 경우, 재하청업체의 근로자들까지도 현대차의 직원으로 봤다. “직접 계약 당사자는 아니지만 묵시적 파견 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번 서울고법의 판결은 2014년 9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1심과 똑같은 법리를 적용했다. ‘실질적으로 원청이 하청업체 근로자에게 직접 근무 지시를 하면 하도급이 아닌 파견’이라는 법리다.
1심과 차이가 있다면 원고 수가 1200여명에서 160여명으로 줄었다는 점이다. 원고 대부분이 현대차 정규직으로 특별채용돼 소를 취하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금속노조, 정규직 노조, 사내하청 노조와의 합의에 따라 6000여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있다.
재계는 대법원의 판단을 주목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대법원마저 공정별·개인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제조업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결론을 내면 고용시장 경직성이 더욱 심화되는 것은 물론 비슷한 소송이 쏟아져 나와 기업들의 부담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노동 문제에 적극 나서는 법원
사내하청 직원들의 원청을 상대로 한 소송은 최근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그 뒤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과 전국금속노동조합(금속노조)이 있다는 게 경영계의 분석이다. 노동계가 세력 확장을 위해 이른바 ‘기획 소송’을 새로운 전략으로 구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전체 근로자 중 노조원 비율·연말 기준)은 1998년 19.8%에 달했다. 하지만 10년 뒤인 2008년에는 10.5%로 반토막이 났다. 2015년에는 10.2%로 내려갔다. 파업 등 강경 투쟁에 염증을 느낀 조합원들이 노조를 기피하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기업들의 ‘노조 탄압’을 노조 조직률 하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민주노총은 이후 통상임금, 근로시간 단축, 사내하청 등 제도를 활용한 법률 투쟁을 들고 나왔다. 수십년간 변해온 근로 현장과 변하지 않는 노동법 사이의 간극에서 헛점을 찾아낸 것이다.
법원은 번번이 노동계의 손을 들어줬다. 통상임금 사건에서 대법원은 ‘상여금은 통상임금’이라고 결론냈다.
통상임금은 야근·주말 특근 등 연장근로의 기준이 되는 임금이다. 근로기준법에는 정의가 없고 시행령에 ‘근로자에게 정기적이고 일률적으로 소정(所定)근로 또는 총 근로에 대하여 지급하기로 정한 시간급 금액, 일급 금액, 주급 금액, 월급 금액 또는 도급 금액’이라고만 규정돼 있다.
고용노동부는 두세달에 한 번씩 지급하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에서 제외된다는 행정해석을 1987년부터 유지해 왔고, 기업과 근로자는 그 해석에 따라 임금을 주고 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연 600~1000%에 이르는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들어가면서 수당도 대폭 오르게 됐다. 체불 임금을 소급해 지급하라는 소송이 빗발치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 문제는 휴일근무 중복할증 소송의 형태로 나타났다. 현행 근로기준법의 정규 근로시간은 1주일에 40시간이다. 연장근로는 12시간 가능하다. 여기에 고용부가 행정해석으로 ‘법 상 1주일은 5일이며 주말근로와 연장근로는 별개’라고 봤기 때문에 기업들은 주말 16시간(8시간+8시간) 추가 근로가 가능했다. 1주일 최대 68시간이 법정 근로시간이었다.
그런데 일부 근로자들이 ‘주말근로도 연장근로’이며, ‘주말에는 주말근로(통상임금의 50% 가산)와 연장근로(통상임금의 50% 가산)를 더해 100%의 가산 수당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근로자들이 내세운 법리는 ‘1주일이 7일이며 주말근로를 별도로 인정해선 안 된다’다. 이 법리를 따르면 1주일 최대 68시간의 법정 근로시간이 52시간으로 줄어들게 된다. 현재 14건의 소송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며, 이 중 11건의 하급심은 근로자 손을 들어줬다.
◆유사 소송 잇달아
사내하청 소송에서도 최근 하급심들은 근로자 손을 들어주는 추세다. 금호타이어 사건에서 광주지방법원(1심)은 하청 근로자가 별도 공간에서 독립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적법 도급이라고 봤지만 광주고등법원(2심)은 2015년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다.
포스코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로 1심은 적법한 도급이라고 판단했지만 2심(2016년 8월)에서 뒤집혔다. 현대제철(2016년 1월·1심), 현대위아(2016년 12월·2심) 사건에서도 법원은 간접생산공정 직원들을 모두 원청의 정규직으로 인정했다.
소송 제기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한라그룹 계열 자동차 부품업체 만도헬라의 하청업체 근로자들은 지난 2월 만도헬라에 근로자 지위확인소송을 제기했다. 현대중공업 등 조선3사 하청업체 근로자들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후 본사를 상대로 소송 제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제조업 뿐 아니라 서비스업에서도 하청업체(대리점) 직원들의 원청 정규직 인정 요구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 사건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서비스와 대리점 계약을 맺은 사업장 근로자 1300여명은 원청인 삼성전자서비스의 근무 지시를 받기 때문에 원청의 직원이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선 적법한 도급이라고 판단했다.
◆“제조업 파견 허용이 해답”
소모적인 불법파견 논란을 줄이고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선 제조업 파견을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독일은 2003년 노동개혁으로 전 업종 파견을 허용하고 기간 제한(24개월)도 없앴다. 이어 일본은 2004년 제조업 파견을 허용했다. 두 나라 모두 성장률이 떨어지고 실업률이 치솟는 상황에서 정규직 고용만으로는 산업 경쟁력 제고와 고용 창출에서 한계를 맞으면서 파견근로 허용 범위를 확대했다. 현재는 노동자 보호가 강한 프랑스에서도 제조업 파견을 허용한다.
한국 정부도 제조업 파견 허용을 추진해 왔으나 정치권과 노동계의 반발에 밀려 번번이 실패했다. 2015년 노·사·정 대타협에서 뿌리산업(금형·단조 등 제조업의 기반이 되는 산업)과 65세 이상 고령자의 제조업 파견 허용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후 이른바 ‘노동개혁 5대입법’에 파견법을 포함시켰지만 무산됐다.
전문가들은 “32개 업종만 파견근로를 허용하고 나머지는 다 안된다는 식의 ‘포지티브’ 규제 방식을 특정 업종만 불허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분석한다. 이상희 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 교수는 “파견근로 허용 범위를 넓히되 파견근로자의 근로조건을 향상하는 방향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산업구조 변화로 더 이상 좋은 일자리 창출이 어려운 현실에서 파견근로가 취업이 어려운 계층(고령자, 여성, 청년)이 일용직 등 질낮은 일자리에서 조금 더 좋은 일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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