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 유연한 생각 하길 바라며 경험 담은 에세이《딴생각》출간
"야근 말라고 보고서 간소화 지시…장관 바뀌니 과거로 돌아가더라"
[ 임근호 기자 ] “정부가 개혁을 하려면 보고서부터 고쳐야 합니다. 지금도 많은 공무원이 ‘보고서 분칠’을 하느라 하루에도 몇 시간씩 시간을 허비하고 있거든요.”
홍석우 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사진)은 서울 삼성동 아셈타워 40층 사무실에서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만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아 이 같은 열변을 토했다. 보고서 분칠이란 윗사람에게 올릴 보고서에서 중요하다 싶은 단어나 문장을 진한 글씨체(볼드체)로 바꾸는 것이다. 홍 전 장관이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보고서 몇 곳에 형광펜으로 칠하거나 밑줄을 긋는 것이 다였다. 컴퓨터로 볼드체 변환이 쉬워지면서 보고서가 온통 시꺼멓게 변했고, 내용보다 겉모습에 더 신경 쓰는 풍토가 생겨났다고 한다.
“모두가 그렇게 하기 때문에 저도 문제를 인식하지 못 했어요. 그러다 무역투자실장이 돼 사무실을 돌아보는데 직원들이 골똘히 일하는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볼드체를 썼다 지웠다 하는 거예요. 장(章)이나 절(節)이 다음 쪽으로 어중간하게 넘어가지 않도록 줄 간격을 조정하거나 아예 내용을 날려버리기도 하죠. 그래서 보고서 분칠을 하지 말자고 했더니 직원들이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제게 가져오는 보고서와 장·차관에게 가져가는 보고서를 이중으로 작성하더라고요.”
그는 직원들 부담을 늘릴 수 없어 한발 물러섰지만 2011년 11월 장관 취임 후 다시 보고서 분칠 없애기에 나섰다. 당시 여러 부처 자료를 하나로 묶으면 지식경제부 자료만 상대적으로 하옜다고 한다. 효과는 오래 가지 못했다. 2013년 초 정권이 바뀌고 신임 장관이 내정됐는데 후보자에게 올리는 보고서는 다시 볼드체로 가득찬 옛날 방식으로 돌아가 있었다.
홍 전 장관은 “정부가 제도 개선과 개혁을 강조하지만 보고서 하나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고서에 분칠을 하지 않으면 내용이 부실해보일 것이란 생각이 공무원 사이에 있다”며 “보고서 분칠이 좋은 거면 민간기업 연구소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그가 2008~2010년 중소기업청장으로 일할 때였다. 어느 중소기업 사장이 정부 지원 서류 작성이 너무 어렵다고 한 얘기를 전해 듣고 중소기업청 기업금융과장에게 민간인 입장에서 정책자금 신청 서류를 직접 작성해보라고 했다. 다음날 그 과장은 “제출해야 할 서류가 많아 깜짝 놀랐다”고 했다.
신용보증재단과 은행에 각각 10~15종류의 서류를 내야 하는데 이 중 10개는 중복 제출이었다. 또 상당수는 행정전산망 등을 통해 담당 공무원이 자리에 앉아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후 중소기업청은 구비 서류를 종전의 25% 수준으로 줄였다. 그가 장관이 됐을 때 연구개발(R&D) 지원 신청 양식을 채우기가 너무 어렵다는 하소연을 또 들었다. 다시 서류를 간소화했다. 하지만 그가 장관에서 물러난 뒤 중소기업 사장들을 만나보면 “절차가 복잡하다”며 여전히 불만을 토로한다고 했다.
“정부도 잘해보려고 제도를 마련했어요. 처음에는 단순하고 명료한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이런저런 사유로 규정을 하나둘 만들어 붙이다 보면 어느 순간 부담스러운 규제가 돼요. 그때는 실무자 힘으로 못 고칩니다. 장관 힘으로도 못 고치고 대통령이나 총리가 나서야 할 때도 있어요.”
AT커니코리아 상임고문으로 있는 홍 전 장관은 4월 이 같은 30여년 공직생활 경험을 에세이로 묶어 《딴생각》을 펴냈다. 공직자들이 더 유연한 생각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홍 전 장관은 어떻게 남과 다른 ‘딴생각’을 하게 됐을까. 그는 “초창기에 시련을 겪은 덕분”이라고 했다. 그는 춘천에서 수재 소리를 듣고 초등학교 3학년 때 홀로 서울로 유학와 당시 최고 명문인 경기중·경기고를 다녔다. 하지만 사수 끝에 서울대 무역학과(현 경제학부)에 들어갔다. 최전방 강원 철원에선 자신보다 어린 선임 병사와 군 생활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이 ‘본의 아니게’ 겸손해진 것 같다”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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