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니체는 저서 《선악을 넘어서》에서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가 오래도록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볼 것이다”고 했다. 범죄스릴러 영화 ‘악마를 보았다’(2010)는 니체에 경도된 제작진이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복수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인용하는 문구기도 하다.
SBS 주말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연출 최영훈, 극본 김순옥)는 기막힌 불행에 대한 여성 주인공 세 명의 통쾌한 복수극을 표방한다. 같은 날 같은 사고가 원인이 돼 신혼여행길에 남편을 잃은 강하리(김주현 분), 시험관 시술 끝에 얻은 딸을 잃은 김은향(오윤아 분), 평생 의지해온 어머니를 잃은 민들레(장서희 분)의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강하리는 웨딩카 기계 결함으로 생긴 1차 사고에서 구조돼 응급실로 가는 도중 난폭운전 택시에 치여 남편을 잃었다. 김은향 역시 좋아하는 햄버거도 못 먹게 하며 귀하게 키운 여섯 살 딸이 집에 혼자 있다가 화재로 불구덩이 속에서 세상을 떠나 제정신일 수 없다. 엄마 없이는 화장실도 못 가는 왕년의 톱스타 민들레도 자신에게 달려드는 스토커의 공격을 엄마가 막아주며 대신 사망했으니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그들 말대로 ‘쳐 죽일 놈, 찢어 죽일 놈, 벼락 맞을 놈’으로 지목된 난폭 운전자도 사망한 상태라 그들의 원망과 고통은 향할 곳을 잃었다. 다 내 탓이라며 죽는 게 더 편하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은 깨닫는다. 뭔가 음모가 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의혹의 끈을 따라가 보니 웨딩카 결함은 고의적이었고, 화재 원인은 남편이었으며, 스토커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 그 연결고리의 중심에는 난폭운전 택시의 실제 운전자인 양달희(다솜 분)가 있다. 당신이라면 이 순간 단서들을 모아 경찰서로 달려갈 것인가?
그들은 경찰이나 법망의 도움은 포기한 지 오래다. 법이 권력 앞에서 진실을 직시하지 않음을 일찌감치 깨달아서다. 민들레가 스토커와 동반 추락하고, 김은향이 남편의 분양권을 간접적으로 취하며, 강하리가 양달희의 이복 여동생을 키우는 것은 그들에게 이미 법은 효력 상실임을 시사한다. 이제 그들은 복수라는 대명제 앞에서 스스로 법이 돼간다.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은 개연성 없는 연결고리로 얽히고설켜 있다. 온 가족이 보는 주말 드라마니 오열과 발악과 독한 말 사이사이 코믹한 설정도 존재한다. 푼수 여배우인 민들레의 과장된 어투와 의상, 캔디 같은 강하리의 대책 없는 씩씩함, 천생 여자인 김은향의 처절함은 막장 구조 사이에서 묘한 균형미를 이룬다.
극 중 표면에 드러난 ‘절대악’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연인의 연구노트를 훔치고도 신분 세탁과 신분 상승을 거듭한 양달희다. 이를 용인하고 이용한 사람은 공룡그룹 본부장인 구세경(손여은 분)이며, 그 위에는 그룹의 존치와 매출 확대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말라고 지시하는 공룡그룹 회장 구필모(손창민 분)가 있다. 악의 먹이사슬 꼭대기에는 ‘법 위의 법’으로 불리는 대기업이 있었다.
지극히 전형적인 막장 복수극은 이제 1막을 마치고 2막에 들어섰다. 드라마에서 잘리고, 남편과 이혼했으며, 시댁에서 살게 됐다던 각자의 삶을 응원한 세 주인공은 1년 후 어디에 서 있을까.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며, 괴물이 되지 않고 통쾌한 철퇴를 가하는 게 가능할까? 아니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막장 복수극으로 치달을까? 김순옥 작가니 최종회의 통쾌함은 기대해볼 만하다. 과정의 억지스러움을 버텨내면 말이다.
이주영 < 방송칼럼니스트 darkblue888@ 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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