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송호근 교수 "사드논란·이념갈등 난무하는 현실…소설에서 출구 찾고 싶었다"

입력 2017-05-19 19:04  

서화동이 만난 사람 - 생애 첫 소설 '강화도' 낸 송호근 서울대 교수

"통제 불능 현대차 노조…방치하면 10년내 심각한 사태 발생할 것"



[ 서화동 기자 ] “선생님, 소설 내신 거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읽어봤나? 어때?” “재미있었어요. 근데 주인공이 연모한 혜련이라는 여인의 캐릭터는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작가들은 대개 자신의 경험에서 인물을 창조한다고 하던데요, 하하.”

지난 15일 저녁 서울대 교내식당.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61)와 제자들의 대화다. ‘스승의날’이라 제자들이 인사를 하러 오겠다고 하자 송 교수가 저녁을 사겠다며 마련한 자리였다. 송 교수는 지난달 생애 처음으로 소설 《강화도-심행일기》를 발표했다. 단편도 아니고 장편, 그것도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소설이다. 데뷔작에 대한 반응이 궁금한 모양이다. 작품 이야기만 나오면 재미있느냐고 물어본다.

소설 《강화도》는 1876년 조선이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일본과 체결할 때 협상 책임자였던 신헌(1811~1884)의 이야기다. 문관이자 무관이던 신헌은 한 달 동안의 협상 전 과정을 ‘심행일기(沁行日記)’로 남겼다. 이를 토대로 봉건과 근대, 쇄국과 개국의 경계에서 몸부림쳤던 신헌의 갈등과 고뇌를 소설로 풀어냈다.

송 교수는 지난 2월 국내 최대, 최강 제조업체인 현대자동차 강성노조의 문제점을 심층적이면서 신랄하게 분석 비판한 《가 보지 않은 길》을 출간해 주목받았다. 1월에는 광화문 촛불집회의 의미와 과제를 짚은 《촛불의 시간》도 출간했다. 스스로를 신헌과 같이 ‘과거와 미래, 내부와 외부를 끊임없이 진자운동하는 경계인’으로 규정하면서 한국 사회의 중심축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있는 송 교수를 서울 신림동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만났다.

▷사회과학자가 소설을 쓴 이유는 뭡니까.

“신헌의 스토리가 워낙 드라마틱해서 뭔가 써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2~3년 묵히던 차였습니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논란과 대통령 탄핵에 따른 지도력 공백 등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때와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가 맞는지도 모른 채 서로 찬성이냐 반대냐, 수용이냐 거부냐 다투고 있지 않습니까. 141년 전에도 그랬어요. 다가오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거부했거든요. 신헌의 스토리를 논문으로 쓰기엔 맞지 않을 듯해서 소설로 썼습니다.”


▷왜 신헌의 역할에 주목했나요.

“쇄국과 척사론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협상의 전권을 위임받은 신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처음 일본이 들이민 13개 조약안은 완전히 문을 열고 청나라와의 관계는 끊고 자기들이 거류민단을 파견하면 보호하라는 거였어요. 신헌은 이것을 12개조로 줄이고 이전의 조공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 약간의 출구만 만들어줬습니다. 받아들이되 우리 실정에 맞게 바꾼 것, 그게 조선의 자율성을 향한 출구였죠. 오늘날 우리는 그런 출구를 만들고 있나요? 사드든 중국의 사드보복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법으로 갈라져 싸우기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신헌은 누구인가 찾고 싶었습니다.”

▷지금 한국의 출구는 무엇인가요.

“사드의 경우 중국이 반발하니 무조건 받기도 그렇고,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고집하니 안 받을 수도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불확실합니다. 어떻게 하면 출구가 있는 방식으로 받을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에 전문가가 한둘입니까. 국회로 공을 넘기기보다 집단지성을 발휘해서 뭔가 만들어내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역시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겠습니다.

“이념 대립으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도자는 촛불과 태극기, 둘 다 봐야 합니다. 촛불혁명뿐만 아니라 태극기의 충정도 수용해야 화합할 수 있어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없애려면 가교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한쪽만 편들면 광장이 전장(戰場)으로 변하는 건 시간 문제예요.”

▷신헌의 묘소가 집필실에서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지난겨울, 신헌의 일대기를 추적하다 그의 묘소가 강원 춘천 부근에 있다는 기록을 접했습니다. 찾고 보니 그 묘역은 제가 20년을 다니던 찻길 바로 위 능선에 있었어요. 20년 전부터 북한강 주변의 작은 농가를 집필실로 개조해 써왔는데 직선거리로는 불과 3㎞ 정도였어요. 전율이었죠. 묘소에 소주를 올리고 한참 서 있었습니다. 이 어른께서 나한테 글을 쓰라고 하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 제목을 ‘강화도’로 한 까닭은 뭔가요.

“봄이면 강화도로 가끔 낚시를 다녔는데 어느 날 그 낚시여행이 역사기행임을 알게 됐습니다. 내가 점심을 먹던 자리가 함대영이 있던 중영(中營)이었고, 주차장과 화장실 자리가 열무당과 연무당 옛터였어요. 강화도는 상고시대부터 역사가 쌓인 곳이지만 특히 근대사의 출발점 같은 곳입니다. 강화부성을 복원해 놨는데 별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강화도 전체가 요새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춘천도 마찬가지예요. 신헌 묘소 건너편에는 그의 평산 신씨 시조인 신숭겸 장군 묘소가 있습니다. 이런 역사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설 써보니 어떤가요. 힘들지 않았습니까.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논문보다 훨씬 쉬웠어요. 논문은 논리를 얘기하므로 논리가 막히면 끝입니다. 우회할 수도 없어요. 소설은 감성을 다루므로 길이 많고 자유롭습니다. 그동안 전공서, 수필집, 칼럼집 등 책을 25권 정도 썼는데 그보다 이 한 권이 훨씬 기쁩니다.”

▷문학에 원래 관심이 많았습니까. 장편이라 구성과 전개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문학은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이라 시작하니 써지더군요. 작품이 제대로 됐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학생 때 대학문학상에서 평론상을 받았어요. 시는 이성복 시인 등 잘 쓰는 경쟁자가 많았고, 소설은 너무 어려워 생각도 못 했어요. 논문과 문학을 합치면 평론이니까 평론을 썼는데 정과리 연세대 교수가 먼저 상을 타는 바람에 저는 재수를 해서 평론상을 탔죠. 대학 4년 동안 전공 공부는 별로 하지 않고 소설과 시만 읽었습니다. 문학적 상상력의 기반 위에서 논리를 주된 도구로 삼는 사회과학을 해온 셈이죠.”

▷그래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로 한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논리에는 끝이 있어요. 현상에 숨은 인과관계를 찾는 게 학문의 본질인데 사회과학은 수십 가지 요인 중 한두 개를 붙잡고 연구하는 겁니다. 한 30년 연구해보니 한계가 보이고 갈증이 생겨요. 거대한 건축물에서 벽돌 하나 들춰낸 느낌이랄까요. 인간의 행위와 사회구조의 90%는 감성으로 이뤄집니다. 5%는 논리, 5%는 윤리 정도죠. 사회과학은 감성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건드려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답답해지는 거예요. 자기 수양이나 삶, 자기와의 대화가 없으니까요. 문학과 역사는 그런데 맞닿아 있으니까 그쪽을 받아들였죠. 전공을 바꾼 것은 아니고. 결국은 저는 경계인입니다.”

▷사회과학의 유용함을 부정하는 것인가요.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제대로 못 하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현실분석이 결여된 채 자신의 방법론으로 합리화하려고 시도하면 착각에 빠지게 돼요. 그래서 많은 사회과학자가 허전해합니다. 나의 직관을 고도의 지식으로 합리화한 것 아닌가, 이게 옳은 학문의 방법인가 하는 회의가 생기죠. 저도 50대 중반쯤부터 그랬습니다. 잘못하면 인생 전체가 거짓말이 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외롭습니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접점이나 교호가 필요하겠네요.

“그게 사회인문학입니다. 사회과학은 논리로 성을 쌓으니 오만해집니다. 인문학은 인간 탐구입니다. 사회과학에는 자기가 없고 논리만 있어요. 인문학은 미궁 속을 걸어가도 자기와 함께 헤매요. 둘을 합치려면 인문학의 바탕 위에 사회과학이 들어오도록 훈련받아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학생들은 더하고요. 문학 작품을 안 봅니다. 얼마 전 학생들한테 괴테 작품을 읽은 사람 손들어보라니까 아무도 없어요. 릴케도, 토마스 만도, 앙드레 지드도, 존 스타인벡도 모릅니다. 입시나 사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죠. 젊은 사람들의 인문학적 창고는 어디에 있는지, 그 창고에 뭐가 들어 있는지 물어보고 살펴봐야 해요.”

▷소설의 무엇이 매력적입니까.

“500호쯤 되는 마을이 있다고 합시다. 사회과학이 그중 두세 집에만 밝은 백열등을 켜놓은 것이라면 문학은 500호 전체를 흐릿하지만 다 비춥니다. 달빛처럼. 문학에는 전체를 감싸주는 힘, 사랑이 있습니다. 언어로 연결된 감성의 네트워크가 사회과학의 비정함과 사회과학자의 허허로움을 메우고 치유할 수 있죠.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 진보, 보수로 나누면 이념대립으로 갑니다.”

▷소설을 또 쓸 생각입니까.

“요즘엔 작은 문제, 작은 이야기를 다룬 사(私)소설류가 많아요. 스케일이 크고 깊어서 많은 사람이 그 안에 풍덩 빠져도 다 받아줄 큰 작품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의 중추신경을 건드리면서 아픔을 공유하고, 반성도 촉구하는 그런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그게 문학의 힘이니까요.”


송 교수의 원래 꿈은 신문기자였다. 자신이 원하는 걸 자유롭게 취재하고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그 꿈을 접었다. 군사독재정권의 언론탄압이 심해지면서 언론의 자유는 극도로 위축됐다. 정보당국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거나 해직되는 일도 많았다. 그는 “비록 학문을 하고 있지만 지금도 기자 근성, 기자 기질이 많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지금까지 현장을 누벼온 것이 이를 말해준다. 송 교수는 학부 때부터 이골이 날 정도로 산업현장 조사를 다녔다. 그가 지난 2월 내놓은 책 《가 보지 않은 길》 또한 현장조사를 통해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분석 고발한 산업리포트다. 노조가 생산현장의 모든 주도권을 장악한 결과 생산성은 동종업계 최저면서 임금은 최고로 받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졌다고 그는 고발했다. 국내 최강으로 꼽히는 현대차 노조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은 “설마, 그럴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낼 정도였다.

▷산업현장과 많이 친하시겠습니다.

“학부 땐 교수님이 질문지를 주면서 이것저것 체크해오라고 하면 멋도 모르고 용돈 받아서 다녔죠. 창원도 가고, 구미도 가고, 울산도 가고. 그때 공장에서 만난 내 또래의 청년들과 그들의 말, 허름했던 여관 등이 아직도 기억에 선합니다. 나중에 보니 그게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었어요. 현장을 어떻게 연구하는지 감을 잡았으니까요. 그 뒤론 연구하고 싶은 게 있으면 울산, 부산, 창원, 마산 등 산업현장으로 내려갔습니다.”

▷현장 사람들한테 다가서는 노하우가 필요할 텐데요.

“물론이죠. 처음부터 관계가 설정돼야 얘기를 해주니까요. 처음엔 공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경비나 수위한테 가서 방문 목적을 얘기하고 담배도 한 대씩 권하면서 사람 좀 소개해달라고 했어요. 그러다 운동권 학생의 위장취업 시도로 오해받기도 했죠.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1981년엔 중위 계급장을 달고 군복 차림으로 설문지를 들고 울산 현대중공업에 갔다가 ‘군인이 무슨 연구냐’라는 경비와 옥신각신하기도 했고요. 일이 잘 안 풀릴 땐 술 한 잔 하면서 얘기하면 술술 나와요.”

▷이번에 현대차는 얼마나 현장조사를 했나요.

“작년에 6개월 정도 했습니다. 50명쯤 만나서 얘기를 들었죠. 현직 노조위원장은 못 만났지만 전직 위원장은 만났어요. 주부도 많이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울산 동구에 있는 주부대학, 문화원, 체육관, 찻집 등에 가면 현대차 직원의 가족이 많아요. 분위기만 잘 맞추면 온갖 얘기를 다 해줍니다.”


▷현대차를 콕 집어서 연구한 까닭은 뭔가요.

“현대차는 한국 제조업의 중심입니다. 삼성전자도 제조업이지만 협력업체 등 연관 효과를 포함하면 제조업에서 현대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큽니다. 현대차를 연구해야 한국 제조업의 고민을 알 수 있어요. 더구나 최강 자본과 최강 노조가 있는 현대차 아닙니까.”

▷현장조사를 하기 전에 현대차와 노조의 문제를 예상했습니까.

“충분히 예상했죠. 현대차를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제자(부산대 교수)는 2007년부터 현대차를 연구했고, 공장에서 1년을 살았습니다. 공장 내부뿐만 아니라 직원들 주거지역에서도 사람들을 많이 만나 조사했고요. 현대차의 생산직과 관리직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데 다들 중산층이라 커뮤니티는 있으나 노동자의 계급의식은 없었어요. 현대차의 노동자 의식이 달라진 것을 주거지역 분석으로 밝혀낸 거죠. 저도 논문 지도를 하면서 이런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생산라인의 주도권을 노조가 쥐고, 시간당 생산량까지 노조가 결정한다는 걸 확인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갑갑했습니다. 노조 대 관리직의 결정권한 비율이 9 대 1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 이상입니다. 모든 걸 노조가 결정합니다. 그래도 공장이 돌아가니까요. 생산성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데 노조의 장악력은 가장 커요. 이런 점에서 현대차 울산공장 노조는 세계 노동운동사에서 볼 수 없는 변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현대차가 돈을 많이 버니까 노동자들이 많이 받는 것 아닌가요.

“그게 아니죠. 노동강도와 생산성을 좌우하는 편성효율을 보면 해외공장이 모두 90%대인데 울산공장은 약 60%에 그쳤어요. 해외공장에서 송금해온 이익금을 더해 울산공장이 높은 임금을 받고 있어요. 한마디로 그건 편취한 임금입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아닙니다. 한 대선후보가 노동자는 연봉 1억원을 받으면 안 되느냐고 물었죠. 당연히 됩니다. 그러나 편취해서 받으면 안 되죠.”

▷울산공장 생산직 사원들이 자신의 고액 연봉을 부정하는 이유는 뭔가요.

“기본급 외에는 월급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자기가 가외로 노동해서 받은 거니까 월급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50대 중반의 한 노동자는 연간 세전소득이 약 4800만원, 성과급과 각종 수당 및 학자금이 2000만~3000만원, 특근수당이 2000만원 정도 됩니다. 그런데도 기본급만 연봉으로 치려고 합니다. 2015년 통계에 따르면 임금근로자 1000만 명 중 절반이 월 200만원 이하를 받고 있는데도 자신들은 고액 연봉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죠. 그렇게 모순된 의식이 뭔지 모르겠어요.”

▷이런 구조를 만들어 놓은 회사에도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쌍방 과실이고 담합입니다. 그런데 회사가 담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상대가 최강 노조기 때문이죠. 담합하지 않으면 공장이 서니까요. 그러니 더 달라면 더 주고 차액은 밖에서 벌어온다는 전략을 회사는 세운 거죠.”

▷책에 대한 현대차 노조의 반응은 어떤가요.

“전혀 없어요. 들리는 말로는 반응을 하고 싶어도 책에서 지적한 게 다 사실이라 들춰내면 긁어 부스럼이 될까봐 못 한다고 합니다. 사실 처음엔 엄청 긴장했어요. 조직이 한 개인을 죽이기는 쉬우니까요. 여차하면 서울대 교수 자리를 내놓고 나가서 벌판에서 싸운다고 각오했는데 아직은 조용하네요.”

▷노조만 너무 비판했다고 역비판 받지 않습니까.

“얼마 전 노동연구원에서 토론하자고 부르길래 갔더니 노동전문가 5~6명이 왔는데 모두 친노조 인사들이었습니다. ‘자본의 어용학자’라고 공격하기에 제가 말했죠. ‘세계 어디서나 자본은 가능하면 착취하고, 이익을 올리고, 덜 주려 한다. 이런 자본을 견제하는 건 국가가 아니라 노동이다. 노동이 제대로 역할을 하면 괜찮은 자본이 된다. 그런데 노동이 현대차 노조처럼 하는 건 자본과의 담합이다. 이런 행태를 알면서도 한번도 공개 비판한 적이 없는 당신들이야말로 노조의 어용학자 아니냐’라고요. 토론 후 술자리에선 그들도 노조의 문제점을 알지만 말할 수 없다고 실토하더군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현대차에선 경영진도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나서면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면 선거 때 지지해준 거, 다음 총선 때 지지 받을 거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국민을 믿고 전면전을 벌일 수도 있다는 각오로 나서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만약 이대로 간다면 얼마나 버틸까요.

“10년 안에 심각한 사태가 생길 겁니다. 전기차, 자율주행차가 상용화돼 생산량의 20% 정도를 차지하면 공장을 많이 바꿔야 합니다. 엔진공장부터 시작해 엄청난 구조조정이 불가피합니다. 그러면 5년 안에 노조와 일대 전쟁이 벌어질 것이고, 그게 어떤 식으로 해결되느냐에 따라 10년 안에 운명이 결정되겠죠. 잘못하면 한국 제조업의 20~30%가 무너집니다.”

▷인공지능 알파고의 한참 후손이 될 ‘감마고’와의 가상 인터뷰가 책 말미에 실려 있던데요.

“노동자들이 2050년에 자신은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라고 쓴 겁니다. 현대차가 당대에 끝나버리면 그땐 없겠죠. 10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외면한 채 이대로 가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송 교수의 이야기는 조선, 철강산업의 문제를 거쳐 새 정부의 일자리 정책, 비정규직의 일괄적인 정규직화가 초래할 부작용까지 이어졌다. 오후 6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제자들과의 저녁식사 후까지 이어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니 밤 11시가 다 됐다. 그 시간에도 연구실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송호근의 종횡무진 글쓰기
"원래 꿈은 신문기자…끝없는 궁금증이 글쓰는 원동력"

송호근 교수는 글쟁이다. 스물일곱이던 1983년 《칼 만하임의 지식사회학》(홍성사)을 처음 출간한 이래 지금까지 단독 저서만 26권을 썼다. 사회학 관련서는 물론 에세이, 칼럼집, 산업리포트 등 분야도 다양하다. 올해에만 《가 보지 않은 길》 《강화도》 《촛불의 시간》 등 세 권의 책을 냈다. 스스로 꼽는 대표저서는 근현대 한국인의 기원을 조선시대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포착한 《인민의 탄생》(2011년)과 《시민의 탄생》(2013년)이다. 강원 춘천 한림대에서 강의하던 1990년부터 일간 신문에 쓰기 시작한 칼럼을 지금도 매주 한 편 쓰고 있다. 스스로 “두 번째 직업은 칼럼니스트”라고 할 정도다.

글 쓰는 일이 스트레스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는 “안 쓰고 있으면 스트레를 받는다”며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 아물지 않은 상처들과 반성 등은 새로운 연구와 글쓰기로 메워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글을 쓴다. 칼럼은 열 번도 더 고친다고 했다. 단어, 조사, 문장 등은 물론 내용이 혹시 오만하지 않는지, 대중에게 뭔가 잘못 전달하고 있지는 않는지 꼼꼼히 보고 또 본다는 설명이다.

송 교수가 열심히 글을 쓰는 건 지식인의 책무라고 생각해서다. 그는 “옛날 선비는 논(論·논문), 시(詩)와 부(賦·에세이), 소(疎·상소문), 책(策·정책), 가사, 일기 등 온갖 종류의 글을 다양하게 썼다”며 “요즘 학자들이 논문 이외에는 잡문이라며 폄하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사회과학은 대중을 통해 현실의 좌표를 파악해야 하므로 대중적 글쓰기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글쓰기는 살아 있고, 정신이 활동한다는 징표라는 것.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망이 있는 한 계속 쓸 것이고, 안 쓰면 삶을 그만두는 것이라고 했다.

다작을 하면서도 문장까지 놓치지 않는 비결은 뭘까. 송 교수는 대학 시절부터 읽은 수많은 문학 작품과 이를 통한 문장 수업을 꼽았다. 10년가량 집중적으로 읽은 역사서도 큰 자산이다. 그는 “사회과학이든 인문학이든 결국 남는 것은 글”이라며 “머릿속에 디스크처럼 저장된 수많은 작품의 장면과 언어와 감성이 융합돼 나온 것이 나의 문장”이라고 설명했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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