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의 당' 해적당, 한 때의 꿈으로 끝나나

입력 2017-05-19 20:02  

이상은 기자의 Global insight

기성정치 염증 공략해 인기
독일·스웨덴서 조직력 한계로 위기
디지털 세대 겨냥 전략은 배울만



[ 이상은 기자 ]
지난 14일 독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주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당(CDU)이 경쟁하던 사회민주당(SPD)을 누르고 최다 득표를 했다.

그러면 가장 적은 표를 얻은 당은 어디였을까. 5년 전만 해도 큰 인기를 누린 해적당(1.2%)이었다. 2012년 이 당이 7.8% 득표율로 20석을 얻은 것에 비하면 큰 퇴보다. 1.2%로는 한 석도 얻을 수 없었다. 해적당은 지난 3월 독일 자를란트주 선거에서도 0.7% 얻는 데 그쳤다. 2012년엔 7.4% 득표율로 4석을 얻었으나 이번에 모두 잃었다.

베를린주 의회 선거 득표율은 2011년 8.9%에서 지난해 9월 1.7%로 급락했다. 이 소식은 항상 머리에 해적처럼 두건을 쓰고 의회에 출석해 눈길을 끈 게르발트 클라우스 브루네르 해적당 의원이 같은 당 동료를 살해하고 선거일 이틀 전 자살했다는 충격적 뉴스와 함께 보도됐다. 이로써 독일 해적당은 주의회 의석을 모두 상실했다.

2006년 스웨덴에서 시작된 해적당은 약 10년간 유럽 전역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저작권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정보 소통을 내세우면서 해적당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구체적으로는 개인정보 보호, 디지털 감시 반대, 인권보호, 직접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정책을 선보였다. 특히 기성 정당의 운영방식을 따르지 않고, 모든 결정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참여를 독려하는 방식이 20~30대 디지털 세대에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유럽의회 의원을 2009년 2명(스웨덴), 2014년 1명(독일) 배출했다. 세계 해적당의 네트워크인 해적당국제연합(PPI)도 조직됐다. PPI에 따르면 세계 43개국에 해적당이나 해적당 추진 조직이 존재한다. 일당독재 체제인 중국에서도 중국도판당(盜版黨)이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정치적 성취를 이뤄낸 곳은 아이슬란드다. 2013년 총선에서 5.1%를 득표했고 작년 총선에선 여론조사 결과 한때 40%까지 지지율이 치솟았다. 최종 득표율은 14.5%였지만 그래도 63석 중 21석을 차지해 원내 2당이 됐다. 작년 말엔 여당과 연정을 구성해 정부 내각에 참여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불발되기도 했다. 나라가 작고 정치 참여율이 높은 데다 지난해 파나마페이퍼스 스캔들 때 고위 공직자들이 부패에 연루된 사실이 공개되며 기존 정치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해적당을 찍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추세로 보면 아이슬란드가 예외다. 해적당의 인기는 빠르게 식어가는 중이다. ‘원조’ 스웨덴 해적당은 2006년 총선에서 0.6%, 2010년 0.7%를 얻었지만 2014년엔 0.4%로 내려앉았다. 한국에서는 2011년 창당이 추진되다가 중단됐다.

해적당은 반짝 인기를 누린 특이한 군소정당에 불과했던 걸까. 그럴 수도 있다. 군소정당의 한계는 조직력과 자금력 부족이다. 해적당도 이 한계를 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해적당 신드롬은 기성 정당 정치에 염증을 가진 디지털 세대의 정치적 욕구를 겨냥했다. 영국 가디언지에 실린 한 칼럼은 “지역 단위로 선거를 치르는 기존 정당정치로는 온라인 세계의 수많은 의제와 특정 지역에 기반하지 않은 사회적 이슈를 다룰 수 없다”며 “해적당이 바로 이 지점을 공략했다”고 분석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서는 매일 뭔가를 주제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지만 현실정치에선 대부분 무시된다. 반면 디지털 세대에겐 정부의 재정 문제보다 온라인게임의 성차별 논란(게이머게이트) 같은 게 더 중요하고 와 닿는 이슈다. 해적당은 오프라인 정체성보다 온라인 정체성을 더 중시하는 젊은이들로 인해 현실 정치가 바뀔 가능성을 보여줬다. 앞으로 등장할 제2, 제3의 해적당은 한층 더 세련된 방법으로 기성 정당의 영역을 잠식할 것이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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