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태평양 따라 '꿈의 도로'를 달리다

입력 2017-05-28 17:05  

고아라 여행작가의 좌충우돌 미국 여행기 (3) 몬터레이

캘리포니아 대표 도로 '17마일 드라이브'…햇살과 쪽빛 바다 황홀하게 어우러져
145㎞의 해안선 따라가는 '빅서 구간'…기암괴석·바다코끼리와 만나는 야생 로드

1940년대까지 정어리 잡으며 먹고살던 어촌마을 대변신
낡은 공장이 레스토랑·부티크로

17마일 드라이브 끝엔
예술가들의 마을 카멜 자리잡아 개성 넘치는 카페·갤러리 가득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자유롭게 달리는 상상은 언제나 즐겁다.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다인 태평양과 거대한 대륙이 맞닿은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샌디에이고까지 약 1000㎞를 잇는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 1(Pacific Coast Highway 1)에서는 이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 캘리포니아의 옛 역사가 담긴 도시를 지나면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진다. 깎아지른 절벽에는 파도가 끊임없이 부서지고, 새들은 노래를 부르며 창공을 가로지른다. 해안가를 따라 보석처럼 알알이 박힌 소도시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때묻지 않은 청정자연의 품속을 거닌다. 꿈에도 몰랐다. 넓은 바다 반대편에 이다지도 아름다운 삶이 펼쳐져 있을 줄은.

아련한 캘리포니아의 옛 추억 속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01번 국도를 타고 남하한다. 실리콘밸리를 거쳐 아름다운 항구도시 샌타크루즈까지 지나치니 어느덧 몬터레이(Monterey)에 도착했다. 언뜻 보기에는 소박한 어촌마을 같지만 알고 보면 미국에서도 유서가 깊은 곳이다. 몬터레이는 1602년 에스파냐인 탐험가인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Sebastian Vizcaino)가 발견했으며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곳이다. 스페인과 멕시코령이던 시절에는 주도(州都) 역할을 했고,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의 영토가 됐다. 그 덕에 이 작은 항구 마을에는 캘리포니아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것들이 많다. 극장도 가장 먼저 세워졌고, 공공 도서관도 처음으로 지어졌다. 캘리포니아 최초 신문인 더 캘리포니안(The Californian)을 인쇄한 곳도 이곳이다. 역사적인 건물 사이로 스페인풍의 오래된 건물 하나가 보인다. 커스텀 하우스(Custom House)다. 캘리포니아 주요 항만이던 몬터레이에 들어오는 상선에 관세를 매기기 위해 1827년께 세워졌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정부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32년 주립 사적지 제1호로 지정됐다. 맞은편 해양 박물관 외벽에 익살스럽게 새겨진 ‘캘리포니아 드리밍은 몬터레이에서 시작됐다’라는 문구가 새삼 진지하게 와 닿는다.

사실 몬터레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정어리(Sardine)’다. 이 작은 생선을 빼놓고는 도저히 이 도시를 설명할 수 없다. 194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몬터레이는 그야말로 정어리 하나로 먹고사는 동네였다. 물론 연어나 넙치 같은 온갖 해산물이 잡혔지만 한 해에 20만t 넘게 잡히는 정어리에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 2차대전 후 몬터레이 만의 정어리 어획량이 급감하면서 도시의 영광도 함께 저물기 시작했다. 올드 피셔맨스 워프(Old Fisherman’s Wharf) 메인 통로에 들어선다.

19세기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세트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항구 창고 정도로 쓰였을 낡은 건물들은 파스텔 톤의 아기자기한 식당으로 탈바꿈했다. 옷을 멋지게 빼입은 웨이터들은 빵에 담긴 크램 차우더 수프를 내밀며 시식을 권한다. 다소 조악한 기념품을 파는 가게나 관광 보트 매표소까지 모든 것이 촌스럽지만 정겹다. 부둣가에 정박해 있는 배들이 파도에 흔들려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어업이 절정을 이루던 시절에는 정어리만큼이나 많은 배가 이곳을 오가고, 어부들은 고단함도 잊은 채 생선으로 가득 찬 어망을 밤낮없이 손질했을 것이다. 몬터레이 만이 훤히 보이는 갑판 위에는 어부 동상 하나와 낡은 피아노만 남아 있다. 화려함이 바랜 선착장 위로 저무는 석양이 아련하고 아름답다.

쪽빛 바다의 황홀한 풍경 이어진 17마일

어업이 호황을 이루자 자연스레 생선 통조림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세계대전 발발은 이에 불을 지폈다. 선착장 주변에 세워진 통조림 공장들은 점점 영역을 넓혀 오션 뷰 대로(Ocean View Blvd)까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캐너리 로(Cannery Row)’다. 우리말로 하면 ‘통조림 공장 골목’이라는 뜻이다. 대공황기의 몬터레이 풍경과 노동자의 생활상을 그린 존 스타인벡의 동명 소설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산업의 중심이 바뀌면서 할 일이 없어진 공장들은 레스토랑이나 부티크로 변모했고, 비린내 나던 거리는 말끔한 쇼핑 단지가 됐다. 그래도 거리 곳곳에는 과거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건물이나 간판에 새겨진 ‘몬터레이 통조림 회사’, ‘정어리 공장’ 같은 문구들이다. 광장에 있는 스타인벡 기념비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몬터레이 베이 수족관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몬터레이에는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도로가 있다. 퍼시픽 그로브(Pacific Grove)를 시작으로 몬터레이 반도의 해안가를 둥글게 도는 17마일 드라이브(17miles Drive)다. 세계적인 골프장 페블비치 코스와 대부호들의 호화로운 저택이 모여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내니 간단한 지도를 건네준다. 델 몬트 숲(Del Monte Forest)부터 버드 록(Bird Rock), 더 론 사이프러스(The Lone Cypress), 포인트 조(Point Joe) 등 21개의 전망 포인트들을 제법 꼼꼼하게 소개해 놨다. 햇살이 가득 담긴 싱그러운 들판과 쪽빛 바다의 황홀한 풍경이 끊없이 펼쳐진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 자전거를 타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까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시간이다. 새들과 바다사자의 천국인 버드 록 포인트를 지나 17마일 드라이브의 백미라고 불리는 더 론 사이프러스에 멈춰 선다. 기암괴석 위에 사이프러스 나무 한 그루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250년이 넘는 세월을 같은 자리에 홀로 서서 태평양의 거친 파도와 해풍을 견뎌냈다. 마치 동양화와 서양화를 섞어 놓은 듯한 오묘한 풍경이다. 근처에 있는 고스트 트리(Ghost Tree)도 볼 만하다. 비바람에 하얗게 고사한 나무들이 기괴한 형태로 여기저기 널려 있다. 해무까지 더해지니 정말 이름처럼 으스스하다.

개성 넘치는 간판과 카페가 이채로운 카멜

17마일 드라이브의 끝에는 카멜 바이 더 시(Carmel By the Sea)가 기다리고 있다. 줄여서 카멜이라고도 불리는 이 작은 마을은 예술가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7년에 설립된 카멜 아트 앤드 크라프트 하우스클럽(Carmel Art and Craft Houseclub)을 시작으로 작가, 화가, 공연인 등 예술가들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1910년대에는 주민의 60%가 예술가였고 보헤미안 작가 페리 뉴베리, 영화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카멜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선 대형 체인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중세 유럽 거리에서나 볼 법한 개성 넘치는 간판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카페, 갤러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하이힐 금지법도 재미있다. 울퉁불퉁한 언덕과 고르지 못한 도로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굽이 5㎝(2인치)가 넘는 하이힐은 신지 못하게 한 것이다. 신는다고 경찰에게 잡혀가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신을 필요도 없어 보인다. 정 필요하다면 허가를 받으면 된다. 메인 거리인 오션 뷰 애비뉴(Oceean View Avenue)를 거닐다 카멜 비치(Carmel Beach)로 내려간다. 동물 애호가들이 많은 도시답게 하얀 백사장엔 사람 반 개 반이다. 여유로움과 자유분방함이 해변을 가득 채웠다. 조금 전까지 본 몬터레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같은 바다를 끼고 살지라도 삶의 풍경은 이렇게 제각각이다.

대륙과 대양이 절경을 이루는 빅서 구간

본격적으로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 1의 하이라이트 ‘빅서(Big Sur)’ 구간으로 진입한다. 빅서란 ‘크다’라는 의미의 영어 빅(Big)과 ‘남쪽’을 뜻하는 스페인어 서(Sur)가 합쳐진 말이다. 카멜부터 허스트 캐슬까지 약 145㎞의 해안선을 따라가는 길이다. 17마일 드라이브가 차분하고 정돈된 풍경이었다면 빅서 구간은 야생 그 자체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대륙과 대양이 끝없이 부딪치며 절경을 이룬다. 질주하고 싶은 욕구가 차오르지만 도로가 꽤 험하니 조심해야 한다. 창밖 풍경이 너무 아름다운 탓에 자꾸만 멈추게 되는 것도 문제다. 아찔한 절벽으로 파도가 힘껏 부딪쳐 하얀 포말을 만들고, 푸르다 못해 짙은 바다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솟아 있다. 해변에는 바다코끼리가 늘어져 있고, 풀밭에는 다람쥐들이 뛰어다닌다. 빅서에는 꼭 봐야 할 것도, 정해진 여행 방법도 없다. 그저 마음 가는 곳에 멈춰 서서 저마다의 풍경을 눈에 담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여행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다 함께 멈추는 장소가 있다. 바로 빅서의 꽃 빅스비 다리(Bixby Bridge)다. 카멜에서 25㎞ 정도 떨어진 구간에 있는데, 압도적인 크기와 극적인 모양새에 못 보고 지나칠 염려는 없다.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산타루치아 산맥의 험한 지형 탓에 겨울철만 되면 도로가 폐쇄되기 일쑤였다.

1832년 빅스비 협곡 사이로 다리가 놓이면서 비로소 통행이 자유로워졌다. 캘리포니아 해안도로 여행에 지대한 공을 세운 셈이다. 다리 북쪽에 있는 주차장 전망대도 좋지만, 반대편에서 태평양을 배경으로 두고 바라보는 빅스비 다리의 모습이 특히 장관이다.

청정자연 느낄 수 있는 주립공원 즐비

자동차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것만이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의 매력은 아니다. 곳곳에 청정자연을 그대로 담은 주립공원들도 놓칠 수 없다. 줄리아 파이퍼 번스 주립공원(Julia Pheiffer Burns State Park)으로 향한다. 야생 꽃들이 가득한 트레일을 따라 한참을 내려간다. 곧이어 코발트 빛깔 해변이 나오고 그 유명한 맥웨이 폭포(Mcway Falls)가 모습을 드러낸다. 1년 내내 끊임없이 흘러 ‘마르지 않는 폭포’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4m 높이의 절벽에서 낙하한 물줄기는 파도를 따라 바다로 유유히 흘러간다. 규모가 큰 것도, 유량이 많은 것도 아닌데 자꾸만 보게 된다. 마치 ‘움직이는 수채화’를 보는 것처럼 신비롭다.

카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포인트 로보스 주립 자연보호구역(Point Lobos State Natural Reserve)은 그야말로 생태계의 보고다. 비옥한 바다와 땅이 만난 곳에 각종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펠리컨을 비롯한 수십 종류의 새들, 여우와 코요테는 물론 바다에선 고래도 관찰할 수 있다. 보호구역 내에는 다양한 트레일 코스가 조성돼 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하나하나 끝까지 걸어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그중에서도 남쪽 끝에 있는 차이나 코브(China Cove)는 반드시 들러봐야 한다. 땅 깊숙이 파고든 만 사이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스며든다. 마치 비밀의 해변을 발견한 기분이다. 트레일은 깁슨 비치(Gibson Beach)와 버드 아일랜드(Bird Island)로 이어진다. 고래 등처럼 솟아오른 땅 위로 까만 새들이 날아든다. 그 뒤로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눈부시게 아름답다.

▶여행정보

렌터카는 국내에서 온라인을 통해 예약하거나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에서 직접 빌릴 수 있다. 알라모나 허츠 같은 회사가 대표적이다. 비용은 회사, 차량, 보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중소형 차량(풀 패키지 보험) 기준 6만~7만원 정도다. 미국의 교통법규는 한국과 다르고 주마다도 다르다. 여행 전 미리 숙지하는 것이 좋다. 퍼시픽 코스트 하이웨이 1으로 진입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샌프란시스코 출발이라면 101번 국도를 타고 샌타크루즈까지 내려와 진입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17마일 드라이브는 사설 도로로 차량 한 대에 10달러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북쪽의 ‘퍼시픽 그로브 게이트’에서 시작해 ‘카멜 게이트’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줄리아 파이퍼 번스와 포인트 로보스 주립 자연보호구역의 입장료도 차량 한 대에 10달러다.

몬터레이=글·사진 고아라 여행작가 minst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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