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내비게이션부터 웨어러블까지…"인류를 지구 끝까지 인도한다"
GPS의 가능성을 포착하다
1984년 미국 정부가 GPS 개방하자
회사 동료였던 버렐과 카오, 의자 두 개·테이블 하나 놓고 창업
내비게이션의 모든 것
1990년 출시한 첫 제품 GPS100, 걸프전 미군사이에서 선풍적 인기
자동차·항공·해양·레저 등 무한 확장
누적 판매량 1억6000만대
30개국 1만1500여명이 일하는 연매출 3조원 글로벌기업으로 성장
심박측정서 러닝·사이클링 분석까지 GPS를 활동 지원 기술로 발전시켜
[ 박상익 기자 ]
각종 스마트 기기가 삶 속으로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길을 못 찾아 늦었다는 핑계를 대기 어려워졌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만 있으면 지도 앱을 켜 약속 장소를 찾을 수 있고, 자동차 운전자들은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만 입력하면 최적 경로를 알 수 있다. 이런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지구상에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는 위성 기반 위치정보기술인 GPS(global positioning system) 덕분이다.
1970년대 미국에서 정밀 유도 폭격을 위해 개발된 GPS는 1980년대부터 민간에 개방됐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엔지니어 개리 버렐과 민 카오는 GPS 기술이 민간 부문의 혁신을 이끌 것으로 직감해 1989년 GPS를 장착한 기기를 만드는 회사 가민을 창업했다. 차량용 내비게이션으로 시작해 세계 최대 규모의 GPS 기기 제조사로 성장한 가민은 그렇게 첫걸음을 내디뎠다.
미국의 길을 연 두 남자
가민의 성장사는 미국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성장사와 궤를 같이한다. 1937년 미국 캔자스시티 스틸웰에서 태어난 개리 버렐은 위치토주립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뒤 렌셀러폴리텍대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민 카오는 1949년 대만 중부에 있는 준샨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대만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뒤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는 테네시대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전기공학 석·박사 학위를 땄다.
킹라디오란 기업에서 GPS 내비게이터 개발팀을 이끌던 민 카오는 1984년 미국 정부가 GPS를 민간에 개방하자 사업 제안서를 작성했다. 회사가 카오의 아이디어를 거절하자 그는 동료인 버렐과 함께 사업을 구상했다. 두 사람은 GPS 기술을 이용하면 비행기 조종사와 배를 모는 선장, 자동차 운전자, 산을 타는 하이커 등이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의기투합했다.
1989년 10월 둘은 개리와 민이라는 이름을 합쳐 가민(GARMIN)이란 이름의 회사를 세웠다. 카오는 “그때만 해도 두 사람 모두 알지 못했지만 그날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인생을 뒤바꾼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처음 회사를 세웠을 때만 해도 사무실엔 접이식 의자 두 개와 카드 테이블 하나가 고작이었다. 두 사람은 그동안 모은 돈을 탈탈 털었고, 가족과 친구를 찾아다니며 사업 계획을 설명해 4만달러를 겨우 모았다.
버렐과 카오가 1990년 내놓은 첫 제품 GPS 100은 걸프전에 참전한 미군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생전 처음 와 본 전장에서 병사들은 GPS 100을 활용해 군사 작전을 펼쳤다. 가민은 이후 항공, 해양, 자동차 내비게이션 등 다양한 산업에 걸쳐 GPS 장치를 개발하며 ‘미국의 길을 연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가민은 현재 세계 30개국에서 1만1500여 명이 일하는 글로벌 기업이 됐다. 2011년 나스닥에 상장한 가민은 지난해 매출 30억달러(약 3조3555억원)를 기록했으며 기기 누적 판매량은 1억6000만 대가 넘는다. 자동차 내비게이션뿐만 아니라 항공·선박·레저·아웃도어·피트니스 등에 특화된 제품을 꾸준히 내놓으며 탐탐과 함께 세계 최대 GPS 단말기 업체로 성장했다.
사이클링 컴퓨터에서 독보적 존재감
한국에서 가민은 차량용 내비게이션보다 사이클링 컴퓨터인 ‘가민 엣지’ 시리즈로 더 유명하다. 가민에서 자전거를 즐겨 타던 한 엔지니어는 등반용 GPS 단말기인 이-트렉스를 자전거에 묶어 달리다 자전거에 특화된 GPS 기기의 필요성을 느꼈다. 2005년 엣지 205가 처음 출시된 이래 500, 510, 800, 1000 등의 모델이 계속 나왔다.
사이클 동호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속도, 페달 회전수, 심장 박동수, 경사도, 지도 등의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엣지에 열광했다. 국내에서 자전거를 많이 타는 사람이라면 ‘어떤 속도계를 구입해도 마지막엔 가민을 선택한다’는 뜻의 신조어 ‘기승전가민’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피트니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민도 자동차, 항공기, 자전거에 부착하는 기기를 넘어 시계 형태로 몸에 지니는 웨어러블 기기에 주목하고 있다. 가민의 첫 웨어러블 제품군인 포러너 시리즈는 2003년 처음 출시된 이후 다양한 스포츠를 지원하는 피닉스, 달리기 전용 포러너, 골프 전용 스마트워치인 어프로치 등으로 분화했다. 지난 4월 한국에 출시된 피닉스 5는 수영 마라톤 등 여러 스포츠에서 쓸 수 있어 소비자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가민 GPS 기기 이용자들은 커넥트라는 전용 프로그램을 통해 스마트 기기와 컴퓨터로 자신의 활동 기록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은퇴 후 엔지니어 양성에 힘써
가민은 핵심인 GPS 기술 향상에 주력하면서 광학 심박수 측정기, 러닝·사이클링 자세 분석 등 운동 능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여러 기능을 추가하고 있다. GPS가 단순히 특정 위치를 안내하는 기술에서 최근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기술로 인식되는 건 가민의 공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개리 버렐은 2002년 은퇴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신앙심 깊은 버렐은 2014년 무기명으로 1400만달러의 회사 주식을 자선단체에 기부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민 카오도 일선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지내며 미래 엔지니어 양성을 위한 장학 활동에 힘쓰고 있다. 가족 자선재단인 ‘카오 패밀리 재단’은 미국 미주리대에 1000만달러를 쾌척했으며 9개 대학에 매년 7000~8000달러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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