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까지 역내 재정통합…미국 국채 같은 안전자산 발행"
[ 이상은 기자 ]
유럽연합(EU)은 불과 두 달 전까지 틀림없이 분열의 길에 접어든 것처럼 보였다. 작년 6월 치러진 영국의 브렉시트(EU 탈퇴) 투표에서 EU의 무능과 구태, 비효율과 경직성이 도마에 올랐다. 왜곡·과장도 있었지만 올바른 지적이란 평가가 다수였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내 경제 규모 3위 이탈리아가 은행 부실과 높은 부채비율로 허덕이는데 유연한 해법을 내지 못하고 ‘규칙을 지키라’고만 강요한 것도 무능하고 딱딱한 EU 이미지를 강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 프랑스·네덜란드·헝가리·오스트리아 등에서 극우파 정치인의 득세도 일관된 흐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흐름을 바꾼 것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당선(5월7일)이다. 그의 당선을 계기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보다 대담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유로존 내 1, 2위 국가인 독일과 프랑스의 연대는 EU의 정치적, 경제적 핵심 뼈대다. 유로존 공동채권(유로본드)을 발행해 공동 예산으로 운용하자거나, 공동 국방체제를 구축하자는 등의 구상은 탄력을 받았다. 한때 거론되던 ‘멀티스피드 EU(EU를 2~3개 그룹으로 분할 운영)’ 주장은 쏙 들어갔다. 어떻든 통합을 더 강화하자는 쪽에 기울고 있다.
구체적인 실행 계획 아이디어도 쏟아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EU 집행위원회가 내놓은 ‘경제·통화동맹 강화에 관한 보고서’와 유럽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의 포털사이트 VoxEU에서 발행한 전자책 《유럽의 정치적 봄: 어떻게 유로존을 고칠 것인가》는 공통적으로 유로화 체제를 뜯어고쳐서 유로존 국가 간 불균형과 위기 대응 능력의 부재, 커지는 정치적 불만을 해소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EU 집행위 보고서는 2019년까지 유로존 내 은행 동맹·자본시장 동맹을 완성하고, 2025년까지 통화동맹 체제를 완전하게 하며(EU 회원국 대부분의 유로존 가입), 미국 국채에 비견될 수 있는 ‘안전자산’을 발행하고, EU의 재무부를 설립해 재정동맹을 구축한다는 로드맵을 담았다.
이 가운데 유로본드와 비슷한 ‘안전자산’ 표현이 눈에 띈다. 유럽 각국이 제각기 국채를 발행하는 대신 유로존 회원국 국채를 담보로 하는 증권을 발행하자는 것이다. 유로존 내 은행들이 미 국채를 사듯 이 증권을 보유한다면 자산을 다변화하고 개별 국가의 리스크에서 다소 벗어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EU 집행위는 기대했다. 투자자들에게는 자본비율 산정 시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유럽·미국 학자 10명이 공동 집필한 《유럽의 정치적 봄》의 해법도 큰 틀에서 비슷하다. 이들은 “마크롱 당선이 유로존 재시동(reboot)의 문을 열어젖혔다”고 평가했다. 이어 유럽안정화기구(ESM) 강화, 채무 재조정 원칙 재정비와 금융위기 시 각국 은행과 정부가 함께 자금 압박을 받는 악순환 해소, 은행동맹 완성, 유로존이 공동으로 쓸 수 있는 예산 확보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단 재정동맹과 같은 미래 전망에 관해선 이 책 저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폴 드 흐라우어 영국 런던정경대(LSE) 교수 등은 공동 예산의 필요성을 지지한 반면, 배리 아이컨그린 미국 UC버클리 교수 등은 재정 문제는 각 회원국 스스로 결정하는 게 낫다고 강조했다. 저자들은 또 브뤼셀의 간섭을 지긋지긋해 하는 각국 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유로존을 보다 ‘탄력적’으로 운용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EU는 20여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체제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유로존 체제가 받은 첫 도전이었고 그 미숙함이 드러나는 계기였다. 이 미완성의 체제는 결국 깨질 것인가, 보완될 것인가.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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