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19) 효성그룹 세운 조홍제

입력 2017-06-12 09:00   수정 2017-06-1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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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교수의 대한민국 기업가 이야기

56세 늦은 나이에 효성물산 세우고 무역업 시작…밀가루·타이어·나일론 사업으로 변신 또 변신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



경남 의령군에는 정암리라는 마을이 있다. 솥 정(鼎)자에 바위 암(岩)자, 솥바위마을이 그 뜻이다. 실제로 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 물 가운데 솥 모양의 바위가 서 있다. 솥뚜껑을 세 개의 다리가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솥은 부의 상징이어서 예부터 솥다리가 뻗은 방향대로 세 명의 큰 부자가 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다. 우연이겠지만 정말로 세 명의 큰 부자가 났다.

의령군 정암리와 세 부자 ‘신화’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은 근처 의령에서 났고, LG그룹의 창업자 구인회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승산리 사람이다. 두 사람은 1923년 같은 해에 지수보통학교 같은 반의 급우이기까지 했다. 또 다른 한 명의 큰 부자는 효성그룹을 창업한 조홍제다. 한때 재계 랭킹 5위까지도 했던 대단한 기업의 창업자다. 조홍제 역시 솥바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군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조홍제의 첫 직장은 1940년 군북금융조합장이었지만 큰 사업을 한 것은 1948년부터였다. 해방이 되자 삼성상회를 하던 이병철이 무역회사를 하자며 조홍제를 찾았다. 조홍제는 이병철의 형과 친구 사이였으니 이병철이 고향 선배를 찾은 셈이었다. 그렇게 둘은 삼성물산공사를 세우고 이병철은 사장, 조홍제는 부사장이 돼 사업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중 서로 뜻이 안 맞아 1962년 조홍제가 삼성을 나왔다. 조홍제의 나이 56세였다.

삼성 나온 뒤 자기 사업 시작

삼성을 나온 조홍제의 손에 들려진 것은 한국타이어와 한일나일론의 주식이었다. 그것을 밑천으로 그는 효성물산을 새로 세웠다. 56세! 당시로선 자리를 내놓고 여생을 즐기기 시작해도 이르지 않을 나이에 새 사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호는 만우, 늦을 만(晩)자에 어리석을 우(愚)자다. 늦되고 어리석은 자라는 뜻이다.

무역업으로 첫발은 디뎠지만 정말로 승부를 보고 싶은 것은 제조업이었다. 생산을 하고 싶었다. 적자 상태의 조선제분을 인수해 몇 달 만에 흑자로 돌려놨다. 다음은 한국타이어였다. 타이어를 사줄 소비자가 많지 않아 사양산업으로 취급받던 업종이었다. 그러나 조홍제는 앞으로 자동차산업이 클 것이라며 전망을 밝게 봤다. 한국타이어의 경영권을 확보한 뒤 품질을 높여 나갔다. 그의 예상대로 새나라자동차의 판매가 늘었고 1969년에는 경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타이어 판매도 급증했다. 부실했던 대전피혁도 인수해 흑자로 돌려놨다. 효성의 사세도 커갔다.

조홍제는 국가 경제의 중요한 역할을 할 미래 산업을 건설하고 싶었다. 심사숙고 끝에 정한 업종이 나일론이었다. 1960년대 당시 사람들의 옷은 대부분 무명이었다. 면화로 만든 섬유여서 빨기 힘들고 무엇보다 잘 떨어졌다. 질기고 빨래도 쉬운 나일론을 생산해서 국민의 생활을 바꿔놓고 싶었다. 1966년 동양나일론주식회사를 세웠다. 그동안 조선제분, 한국타이어, 대전피혁에서 번 돈을 쏟아부어가며 공장을 건설해갔다. 설비와 기술이 모두 외국산이었기 때문에 기술을 배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실무총책은 장남인 조석래에게 맡겼다. 1968년 드디어 공장이 완공되고 시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동양나일론은 효성그룹의 핵심사업이 됐다. 나일론 의류 수요가 늘면서 동양나일론의 섬유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타이어코드 생산에 성공하면서 계열사인 한국타이어와의 시너지 효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에는 적자에 빠진 한일나일론을 인수해 합병했고 1973년에는 동양폴리에스터와 동양염공을 설립했다.



현명한 기업가

조홍제의 다음 사업은 변압기 제조였다. 1970년대 이전 한국의 전기 공급 상태는 좋지 않았다. 단전도 잦았고 전기의 안정성도 떨어졌다. 좋은 변압기를 만들고 싶었다. 1975년 민영화되는 국영기업체 한영공업을 인수해 효성중공업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기의 품질을 높이는 사업은 효성의 또 다른 주력사업이 됐다. 이를 계기로 효성은 재계 순위 5위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조홍제는 1984년 1월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그의 자리는 장남인 조석래가 이어받았다. 늦게 시작했지만 큰 업적을 이뤄냈으니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현명한 기업가였다.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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