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총선도 휩쓴 프랑스 마크롱 혁명…'유럽의 병자' 흔들어 깨우다

입력 2017-06-20 20:27   수정 2017-06-21 09:06

프랑스 뒤흔든 '앙마르슈 돌풍'

실업률 4년연속 두 자릿수대…무능한 기성정치에 분노 폭발
고용 유연화 등 시장 친화적 정책 내세워 '개혁 출사표'
기득권 사수에 나선 거대 노조들 반발 등 난제 수두룩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엘리제궁(대통령 집무실)에 이어 부르봉궁(하원의사당)까지 장악했다. ‘프랑스판 제3의 길’을 기치로 정치판에 뛰어든 지 불과 1년2개월 만이다. 그가 이끄는 ‘레퓌블리크 앙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와 ‘민주운동당’ 연합은 총선(하원)에서 전체 의석 577석 가운데 350석(60.7%)을 차지했다.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역대 최저 총선 투표율(42.6%)이 말해주듯 다수의 프랑스인은 그의 ‘벤처기업형 새 정치 실험’에 아직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않고 있다. 노조 반발 등 난관을 뚫고 그의 중도, 탈(脫)이념 정치실험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행운’과 ‘개인기’ ‘프랑스의 어두운 역사’. 마크롱 대통령이 맨 바닥에서 시작해 단기간 내 프랑스 거대 정당들을 제치고 의회권력까지 거머쥔 배경을 두고 미국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요약했다. 대선 과정에서 유력 경쟁자가 부패 혐의로 무너지는 등 정치 지형이 유리하게 돌아간 것, 시대를 잘 읽고 기회를 포착하는 마크롱 대통령의 능력, 저성장과 고실업에 시달려온 프랑스의 경제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프랑스 국민이 39세의 정치신인에게 승리를 안겨준 것은 변화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르몽드 등 언론들은 ‘데가지즘(Degagisme: 구체제나 옛 인물의 청산)’으로 표현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경제활성화에 성공하지 못한 기성정치에 대한 분노가 마크롱 돌풍의 원동력이 됐다”고 보도했다. 사회당의 무능으로 인해 마크롱 대통령이 반사적 수혜를 본 것도 사실이다.

성장동력 약화, 저성장·고실업 지속

프랑스는 1981년부터 14년간 집권한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이래 큰 정부, 큰 복지, 다(多)규제, 작은 시장 흐름을 이어왔다. 특히 미테랑 정부에서는 주요 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성장동력이 약화됐고, 저성장과 고실업이 지속되면서 국민의 불만이 누적됐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2013년 10%를 넘어선 이래 4년 연속 두 자릿수대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해 전체 실업률은 10.1%였고, 25세 미만 청년실업률은 24.6%에 달했다. 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EU)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독일(지난해 전체 실업률 4.1%, 청년실업률 7.0%)에 비해 상황이 훨씬 안 좋다. 프랑스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의 회복 속도에서도 다른 나라에 비해 느리다. 지난해 EU 28개국의 평균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1.9%를 기록했지만 프랑스는 1.2%에 그쳤다. 독일은 노동 분야 등 구조 개혁을 통해 앞으로 치고 나갔으나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는 2012년 집권 뒤 혁신의 시동도 걸지 못했다.

도미니크 모이시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 선임고문은 “사회당은 급변하는 현대 정치의 아젠다를 설정하는 데 실패했다”며 “프랑스 국민은 (이번 선거를 통해) 포퓰리즘과 싸워야 한다는 본질적 가치를 지켜낼 수 있음을 세계에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마크롱이 일으킨 돌풍을 ‘데가지즘’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기회를 포착하는 정치적 감각과 리더십이 없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사회당 정부에서 경제 각료를 지낸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선언한 뒤 극좌와 극우 양 극단을 배제하고 중도에서 세력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병(病)’을 극복하겠다며 재정 건전화와 시장친화적 정책을 내건 것이 주효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해석했다.

노사 교섭, 산별에서 개별기업으로

마크롱 대통령은 5년간 정부 지출을 600억유로(약 76조원) 줄여 국내총생산 대비 재정적자 비중을 EU 기준인 3% 아래로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또 창업과 산업구조 개혁에 600억유로를 투입하겠다고 했다. 33.3%인 법인세율을 EU 평균인 25%로 내리는 파격적인 감세안도 제시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마크롱의 정책이 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해낼 수 있을 것으로 유권자들은 받아들였다고 분석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내세우는 대표적 정책은 노동개혁이다. 경제장관 시절인 2015년 우파 요구를 수용, 주 35시간 근로시간을 유지하면서도 일이 몰릴 때는 주 60시간 근로가 가능하도록 하는 법안을 관철시킨 바 있다. 그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노동시장 유연화를 계획하고 있다. 초과 근로수당 축소, 퇴직금 상한제 도입 등이 대표적이다.

또 전국 단위의 산별로 시행되는 노사 교섭을 개별 기업 단위에서 할 수 있도록 법을 손질하겠다는 방침이다. 막강한 산별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담았다. 유럽 통합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보면서 ‘브렉시트(EU 탈퇴)’를 택한 영국과 차별화하는 등 ‘글로벌 가치 수호 이미지’를 취한 것도 집권에 도움이 됐다.

그렇다고 마크롱 대통령의 앞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의회 권력까지 장악해 개혁을 추진할 동력은 확보했지만, 실행은 또 다른 문제다.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노조를 설득하는 게 발등의 불이다. 노조는 19일(현지시간) 프랑스 전역에서 대규모 반(反)마크롱 집회를 열었다.

총선 투표율이 낮은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결선 투표율은 42.64%로, 역대 최저다. 정치컨설턴트 제롬 생트는 “노동자들의 민심이 떠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인터넷 매체 더로칼은 “마크롱의 반대자들은 의회가 아니라 길거리에 있다”고 했다. 김정곤 KOTRA 전문위원은 “투표율이 낮았다는 것은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는 뜻”이라며 “마크롱 대통령이 여론 지지를 업고 노조의 반발을 뚫어 나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악수 기싸움’으로 주목 받았지만…

마크롱 대통령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악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의석 수 확보에 도움이 됐지만,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고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적했다. 타임은 “프랑스인들은 마크롱 대통령이 자기보다 나이가 두 배 많은 미국 대통령에게 보인 당당한 태도에 속시원하다고 느꼈다고 한다”며 “그러나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현실은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의회권력까지 지배하면서 권력 남용 우려도 나오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정치신인이 많은 거대 여당이 자칫 마크롱 정부의 거수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인 조엘 공뱅은 “의정경험이 없는 많은 신참 의원은 정부에 도전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행운과 개인기 등으로 ‘창업’에 성공한 마크롱 대통령의 정치 실험이 결실을 거둘 수 있을까. 그 여부는 거대한 공공부문 및 막강한 노조와 ‘시장경제 활성화’ 사이의 차이를 얼마나 줄여나갈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현지 언론들은 지적했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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