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 전문가들도 깜짝 놀란 최태원의 '승부수'
민관펀드 INCJ 끌어들여 일본 경계심 풀고
독과점 심사 쉽게 지분인수 대신 자금 대출
IPO 때 재무적 투자자들의 지분 확보 가능
[ 좌동욱 / 도쿄=김동욱 기자 ] 도시바가 21일 세계 2위 낸드플래시 제조 자회사인 도시바메모리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한국의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컨소시엄을 선정한 것은 국내외 인수합병(M&A) 전문가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대역전극이었다. “일본 정부가 원한 명분과 실리를 제공하면서도 반한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로키(low-key·이목을 끌지 않는 저자세)’ 전략을 고수해 불리한 판세를 뒤집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어떻게 뒤집었나
일본 정부는 매각 초기만 하더라도 중국이나 한국 등 아시아 기업에는 도시바메모리를 매각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하게 내비쳤다. 세계 최대 가전 수탁생산업체인 대만 훙하이그룹은 SK하이닉스 컨소시엄이 제시한 2조엔(약 20조5000억원)보다 50%나 많은 인수가격(3조엔)을 제안했지만 인수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도시바메모리는 낸드플래시 세계 시장의 19.5%를 차지한 2위 업체다. 5위권인 SK하이닉스(10.2%)가 도시바메모리를 인수하면 세계 1위인 삼성전자 시장 점유율(36.2%)에 근접한다.
하지만 이런 방안은 세계 각국의 반독점 심사를 통과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더구나 도시바는 7000억엔(약 7조2000억원)에 달하는 원전 투자 손실에 따른 상장 폐지를 모면하기 위해 내년 3월까지 도시바메모리 매각을 완료해야 하는 상황이다. 협상 날짜가 별로 없었다. 일각에서 SK하이닉스의 도시바 인수가 무모하다고 평가한 이유다.
반전의 기회는 일본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INCJ)를 컨소시엄에 끌어들이면서 찾아왔다. 당초 일본 정부는 반도체 핵심 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INCJ와 일본 기업으로 컨소시엄을 꾸리는 방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업황 부침이 심하고 대규모 투자를 선행해야 하는 반도체산업에 뛰어들 일본 제조업체를 찾기 어려운 상황을 간파하고 집요하게 INCJ를 설득했다. 인수전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일본 정부의 의중이 실린 INCJ와 컨소시엄 구성에 성공한 것이 역전의 발판이 됐다”고 전했다.
◆어떤 이득을 노리나
인수 구조도 일본 정부의 구미에 맞게 설계됐다. 인수 주체는 일본 INCJ를 내세웠다. 총 인수금액은 2조엔으로 알려졌다. 일본 외신 등에 따르면 INCJ, 일본정책투자은행(DBJ), 베인컴퍼니 등이 3000억엔 안팎을 출자하는 구조다. 이에 따라 일본 투자자들이 절반 이상의 지분을 보유할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분 투자가 아니라 대출 형식으로 인수 자금을 대기로 했다. 세계 각국의 독과점 심사를 통과하는 데 수월하다는 이점이 있다. SK하이닉스가 분담하는 돈도 3000억엔 안팎으로 추정된다. 다만 SK하이닉스는 대출금을 차후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옵션을 보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도 복수의 일본 기업들이 총 2000억엔 안팎을 출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M&A를 통해 SK하이닉스가 거두는 이득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분석이다. 우선 도시바메모리가 중국 기업으로 팔리는 최악의 사태를 막았다. 또 반도체 시장에 새로 들어오는 경쟁자를 없앴으며 도시바의 제조 기술력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기회도 얻었다. 현재 풍부한 현금흐름에 비춰볼 때 투자에 따른 재무적 위험도 거의 없다.
반도체업계는 3년이 지난 뒤 도시바메모리의 기업공개(IPO)가 추진되는 시점을 주목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INCJ가 주도하는 컨소시엄 내부에서 도시바메모리를 인수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적 투자자(SI)다. 반면 INCJ를 비롯한 재무적 투자자(FI)들은 IPO를 전후해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지분을 팔아야 한다. 이에 따라 도시바메모리 상장을 전후한 시점에 SK하이닉스가 도시바메모리 경영권을 인수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이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노 코멘트”라고 말했다.
좌동욱 기자/도쿄=김동욱 특파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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