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막섬' 전남 우이도
세상 모든 무게를 내려놓고 '멀어서 더 그리운' 섬으로 간다
작은 사막을 옮겨 놓은 듯한 80m 높이의 모래언덕 '산태'
신비한 풍경 여행객 사로잡아
야생의 모습 그대로 간직한 '띠밭너머해변'에 다다르면
시간여행 온 듯한 착각 일으켜
홍어장수 문순득·정약전 집터
옛 이야기 품은 흔적도 곳곳에
막 건져온 살찐 농어회, 파래·방풍뿌리 무침에 진귀한 약초막걸리까지
섬밥상 별미에 '즐겁다'
섬은 무중력의 공간이다. 세상의 모든 무게를 다 내려놓게 한다. 그래서일 것이다. 늘 섬을 떠돌며 사는 나그네도 어깨 위의 무게가 버거울 때마다 다시 섬으로 가게 되는 것은. 모래바람이라도 불어 쌓인 것일까. 오늘은 또 문득 어깨를 털며 섬으로 간다. 우이도. 멀어서 더 그리운 섬. 목포항에서 편도 3시간의 뱃길. 여객선도 하루 한 번밖에 왕래하지 않는 낙도다. 지금은 한적한 섬이 됐으나 우이도도 한때는 몰려드는 여행자로 몸살을 앓던 시절이 있었다. 모래 때문이었다. 산태(山汰).
바람의 손길이 만들어낸 모래언덕(풍성사구), 산태는 우이도 돈목과 성촌 해변 사이에 있다. 산태는 우이도의 상징이자 우이도를 세상에 알린 주역이었다. 80m 높이의 산태는 작은 사막을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다. ‘섬 속의 사막’이라는 이국적 풍경이 여행자들을 불러 모은 동력이었다. 오랜 세월 산태는 주민들의 골칫거리였다. 바람 불면 몰아치는 모래 때문에 생활하기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우이도 처녀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는 말까지 생겼을까. 그래서 골재로 팔릴 뻔도 했었다. 그런 산태가 명성을 얻으면서 골칫거리가 보물이 됐다. 이 풍경을 보기 위해 한 해 3만 명씩이나 찾아들었다.
모래사막이 만들어낸 신비한 풍경
산태를 배경으로 유지태 김지수가 주연한 영화 ‘가을로’가 제작되기도 했으니 섬 속의 사막은 내륙인들의 노스텔지어(향수)를 흠뻑 자극했던 셈이다. 산태에는 애틋한 전설도 전해져 신비감을 더했다. 그 옛날 돈목마을 총각과 성촌마을 처녀가 사랑에 빠졌다. 둘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산태 그늘 아래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이 나오지 않았다. 어선을 타고 나간 총각이 풍랑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처녀는 슬픔을 못 이겨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후 산태에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었다. 죽은 총각은 바람이 되고 처녀는 모래가 됐다 했다. 그래서 두 연인이 만나 사랑을 나눌 때마다 산태에는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이라 했다.
우이도가 세간의 관심을 끌면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출입하자 산태는 조금씩 훼손돼 갔다. 국립공원에서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복원에 나섰다. 하지만 출입금지 조치가 오히려 사막 지형이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막은 초지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산태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만들어낸 지형이었다. 우이도에서 산태는 아이들이 미끄럼이나 썰매를 타고 놀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래서 풀이 자라지 않았고 사구가 발달했다. 인간의 적당한 간섭이 산태를 유지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산태는 이제 더 이상 사막의 모습은 간데없고 잡풀이 자라는 모래언덕이 돼버렸다. 더 이상 이국적이거나 신비한 매력도 없어졌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관광객 발길이 뜸해졌다. 모래바람에 신기루처럼 나타났던 사람들이 어느 날 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산태를 보호하려던 국립공원의 정책이 오히려 산태의 멸실을 불러와 우이도의 관광자원을 없애버린 꼴이 됐다. 산태가 사막의 원형을 되찾으면 떠났던 여행자들도 다시 돌아올까.
우이도는 조선시대 수군이 주둔한 흑산진 관할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가거도를 소흑산도라 불렀지만 원래는 우이도가 소흑산도였다. 우이도란 이름은 섬의 모습이 황소 귀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졌다 한다. 섬 서쪽 양단에 두 개 반도가 돌출한 것이 소 귀 모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구섬 혹은 우개도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면적 10.70㎢, 해안선 길이 21㎞. 섬은 1구 마을과 2구 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 수군이 주둔하던 진리 마을이 1구이고 지금도 섬의 행정 중심이다. 2구는 성촌과 돈목 마을, 두 곳의 자연 부락을 아우르고 있다. 이 밖에 대초리, 예리 등 몇 개의 작은 마을이 더 있었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고 빈집들만 남았다. 옛길을 따라 1구에서 2구로 걸어 넘어가다 보면 폐허가 된 우이도 최초 마을 대초리를 만나게 된다.
6개나 되는 백사장
우이도에는 산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산태의 명성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보물도 많다. 무엇보다 큰 보물은 6개나 되는 백사장이다. 해변들은 산태 못지않은 비경인 데다 수심이 해수욕하기에 적당하다. 우이도에서는 해변을 장골이라 한다. 그래서 돈목해변은 돈목장골, 성촌해변은 성촌장골, 띠밭너머해변은 띠밭장골이다. 나머지 3개는 돈목에서 도리산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해변들인데 장칠, 장고래미, 넙번지 장골이다. 이 세 곳의 해변은 마을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비밀의 해변이기도 하다. 돈목, 성촌 해변은 제법 이름난 해수욕장이지만 해변들 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띠밭너머해변이다. 이 드넓은 해변에는 인공 구조물이 전혀 없다. 야생의 모습 그대로다. 진리 마을에서 염소들이 풀을 뜯는 목초지 언덕을 넘어서면 띠밭 해변이 펼쳐지는데 전봇대 하나 없는 해변은 마치 시원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또 하나의 보물은 축조된 지 300년 남짓 된 진리마을의 옛 선창(船艙) 즉 부두다. 우이 선창이란 이름을 가진 이 선창은 1745년 3월(영조21년)에 완공됐으니 아마도 원형이 보존된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옛 선창이지 싶다. 한국 해양문화사의 독보적 유물이다.
우이 선창은 포구와 방파제, 배를 만드는 선소((船所) 기능까지 했다. 요즘 만드는 방파제들도 큰 태풍 한번이면 무너지기 일쑤인데 300년 동안이나 유지됐다는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전라남도 기념물 243호다. 국보급 문화재가 겨우 ‘도 기념물’이란 사실은 가슴 아프다. 우리가 얼마나 바다와 섬과 해양사를 천대하고 있는지를 이 선창에 대한 대접이 보여준다. 국보나 보물 등 국가문화재로 지정해야 마땅하다.
우이도는 또 해양사의 진귀한 서사가 깃들어 있는 유서 깊은 섬이기도 하다. 1801년(순조1년) 제주도에 배 한 척이 표류해 왔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나라 사람으로 여기고 심양으로 송환했으나 청나라에서는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니라며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표류인들은 9년 동안이나 제주도에 억류돼 있었는데 1809년 이들 앞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우이도에 사는 문순득(1777~1847). 표류인들은 여송국(필리핀) 사람들이었다. 문순득이 여송국 언어를 알고 있었기에 표류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에 나오는 실화다. 그런데 조선 섬사람 문순득은 어떻게 필리핀말을 알게 됐던 것일까.
동아시아 풍속 담은 표해시말
문순득 또한 표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어장수 문순득 일행은 1801년 12월 흑산도 인근 태도 서바다에서 홍어를 싣고 영산포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해 유구국(琉球國, 현재의 오키나와)까지 흘러갔다. 유구국에서 3개월을 머물다가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행 배를 탔는데 다시 풍랑을 만나 여송국의 마닐라까지 표류해 갔다. 문순득은 여송국에 9개월을 머물다가 마카오, 광둥, 난징, 베이징을 거쳐 1805년 1월에야 고향 우이도로 돌아왔다.
역사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문순득의 표류담이 전해진 것은 당시 우이도에서 유배살이를 하던 정약전 덕분이다. 다산 정약용의 형이자 《자산어보》 저자인 정약전은 신유박해 때 흑산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정약전은 흑산진 관할이던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는데 문순득의 귀향 즈음에는 우이도에 살고 있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표류담을 전했고 정약전은 이를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남겼다. 책에는 문순득이 경험한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풍속과 생활상, 언어 등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다. 오키나와 지역의 장례 문화와 전통 의상에 대한 기록도 있고, 당시 필리핀 사람들이 닭싸움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816년, 정약전이 최후를 맞이한 곳도 우이도다. 진리 마을에는 홍어장수 문순득이 살던 집과 정약전이 살던 집터가 남아 있다. 문순득의 집은 근래까지 후손들이 살다가 빈집으로 방치돼 있다. 깃든 이야기뿐만 아니라 200년이 넘은 건축 역사만으로도 문화재 가치가 크다.
그런데 후손들이 국가의 보호를 요청하며 신안군에 헌납까지 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문순득이 높은 벼슬아치였더라도 그랬을까. 속히 문화재로 지정해야 마땅하다.
약초막걸리와 섬밥상 별미
우이도에는 식당이 따로 없다. 민박집에 묵어야만 식사를 할 수 있다. 집집마다 각기 다른 밥상을 받아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여행의 묘미다. 오늘 섬 밥상에는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다 모였다. 우이도는 해산물과 산나물 등이 풍성한 데다 육지와 교류도 쉽지 않아 대부분 섬 자체에서 나는 생산물로 밥상을 차린다. 진정한 로컬푸드고 제철 밥상이다. 그물에서 막 건져온 살찐 농어회와 농어 맑은국, 모래밭에 깊이 박혀 있어 캐기 어려운 방풍뿌리 무침. 우이도 산 고사리나물과 파래무침. 다들 조미료나 설탕이 없어도 다디달다.
그런데 이 풍성한 밥상에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우이도의 명물이 있다. 약초 막걸리다. 진귀한 약초 막걸리가 섬 밥상의 흥을 돋운다. 우이도는 약초술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전설적인 술꾼도 생존해 있다. 팔순이 되도록 평생 술만 마시고 살았는데도 여전히 건강하다. 우이도에서는 그가 마시는 술을 조금술이라 한다. 술자리를 한번 시작하면 바다 물때인 한 조금 동안 계속되기 때문이다. 한 조금의 주기는 보름이니 한번 앉았다 하면 보름을 쉬지 않고 마셔 댄다 해서 조금술이다. 술고래도 이런 술고래가 따로 없다. 그런데 그가 마시는 술은 죄다 약술이다. 하수오, 우슬, 더덕, 도라지, 천문동 등 우이도 산야에서 나는 여러 가지 약초를 캐다 술을 담가 두고 먹는다. 그 술고래 어른처럼 삽주, 천문동, 엉겅퀴, 잔대 등의 약초를 가마솥에 푹 달여내 담근 약초막걸리 한잔을 마시니 술보다 약초 향에 취하는 듯하다. 우이도 섬밥상과 약초막걸리. 이것만으로도 우이도에 가야 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강제윤 시인은
섬 여행가. 지난 10년간 한국의 사람 사는 섬 400여 개를 걸으며 글과 사진으로 섬과 섬사람들의 삶을 기록했다. '인문학습원' 섬학교에서 매월 한 번씩 4년째 섬 답사를 이끌고 있다. 《통영은 맛있다》 《자발적 가난의 행복》 《보길도에서 온 편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서울, 인천, 경남 통영 등에서 섬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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