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중동의 집시' 쿠르드족

입력 2017-07-16 17:50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인구 4000만 명의 단일민족이면서도 국가를 갖지 못한 ‘중동의 집시’. 쿠르드족은 아랍인이 아니라 유럽계의 코카서스 혈통이다. 언어도 아랍어 대신 인도유럽어족의 쿠르드어를 쓴다. 결속력은 강하지만 나라가 없어 터키(2000만 명), 이란(1100만 명), 이라크(600만 명), 시리아(300만 명)에 흩어져 산다. 이들의 거주지인 고원 지대와 티그리스강 상류는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으로 불린다.

유랑민족이라고 해서 유약한 건 아니다. 12세기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십자군을 물리친 ‘이슬람 영웅’ 살라딘이 쿠르드족이다. 16세기 오스만튀르크에 복속된 뒤로도 끊임없이 독립투쟁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강대국들의 이해충돌과 주변국의 반대 등으로 번번이 쓴맛을 봤다. ‘쿠르드족에게는 친구가 없고 산(山)만 있다’는 속담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들의 땅은 1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가 자의적으로 국경선을 그은 ‘사이크스-피코 협정’ 때문에 여러 나라로 쪼개졌다. 한때 독립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지만 각국의 차별 속에서 여전히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쿠르드 문제는 중동 전체와 맞물려 있다.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석유와 수자원이 대부분 이들 거주지에 분포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더욱 첨예하다. 물은 사막에서 돈보다 더 귀하다.

인근 국가 중 쿠르드족이 가장 많이 사는 터키의 반응도 민감하다. 이들의 거주지가 국토의 3분의 1에 이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터키는 쿠르드족 반군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가 종신형으로 감형한 뒤로도 쿠르드인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여기에 이스라엘 변수까지 겹쳐 있다. 과거 쿠르드 지역에 살던 유대인이 5만 명이나 될 정도로 양측의 관계는 밀접하다. 이스라엘 부총리와 국방장관을 지낸 이츠하크 모르데카이도 쿠르드계 유대인이다. 아랍과 이스라엘, 쿠르드의 3각 관계에 따라 정치 지형이 급변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라크 모술에서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를 격퇴한 덕분에 쿠르드 민병대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를 계기로 이라크 내 쿠르드족은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오는 9월 실시하기로 했다. 국제사회에선 투표 결과가 ‘찬성’으로 나오더라도 독립이 이뤄질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다. 해당 지역에 밀집한 유전 때문에 이라크 정부가 반대할 게 뻔하다는 것이다.

이라크의 분리로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는 미국도 반대할 태세다. IS 격퇴의 일등공신이 되고도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비운의 민족’ 쿠르드. 냉혹한 국제정치의 이면을 보여주는 이들의 이야기가 남의 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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