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현실에 정신까지 방전
갑자기 몰려드는 무기력감
현실 탈피위해 인형뽑기 등 단순 게임에 빠져들기도
심하면 우울증으로 이어져
지친 뇌를 쉬게 하라
틈틈이 시 읽으며 마음 다스리고 친구와 수다 떠는 것도 좋아
스마트폰 두고 당일치기 여행, '멍 때리기'도 효과적
[ 이지현 기자 ] 30대 직장인 박모씨는 두 달 전부터 심한 무기력증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입사한 지 올해로 6년차다. 회사뿐 아니라 집에서도 일할 정도로 업무에 열정적인 그였다. 하지만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출근할 생각을 하면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던 박씨가 며칠 전부터 인형뽑기에 빠졌다. 인형을 잘 뽑지는 못하지만 한번에 1만원 이상을 써가며 인형뽑기를 한다. 박씨는 “인형을 뽑으며 집중하면 피로감, 무기력감 등을 잊을 수 있다”며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쓴다는 것을 알지만 인형을 뽑으면 성취감이 생겨 그만둘 수가 없다”고 했다.
여름이 되면 무기력감, 피로감 등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푹푹 찌는 무더운 날씨에 체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박씨처럼 몸은 물론 정신까지 방전되는 사람도 많다. 일에 지나치게 몰두해 정신적 에너지가 바닥나는 소진증후군을 겪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많이 등장하는 ‘시발비용’ ‘탕진잼’ 등의 신조어도 정신건강 경고음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들 용어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비에 몰두하는 것을 말한다. 힘든 상황을 잊기 위해 이 같은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소진증후군, 우울증 등이 생겨 쾌락에 집중할 수도 있다. 무더운 여름철 정신건강을 지키는 법에 대해 알아봤다.
우울한 현실 반영하는 ‘탕진잼’
‘탕진잼’이라는 말은 시간이나 재물을 낭비한다는 의미의 탕진과 재미의 준말인 잼을 합성한 단어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재미를 위해 소소한 시간과 돈을 쓴다는 의미다. ‘시발비용’은 욕설을 뜻하는 단어와 비용이 합쳐진 단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쓰지 않았을 충동적 비용을 의미한다. 이들은 합리적으로 실용성을 따지는 소비가 아니다. 현재의 쾌락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소비 행태다. 야근한 뒤 스트레스를 풀려고 대중교통 대신 택시를 타거나 먹지 않아도 될 야식을 시켜먹는 것 등이다. 한두 번 재미로 하는 인형뽑기에 몰두해 매일 몇천 원, 몇만 원씩 돈을 쓰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이 같은 행동의 이면에는 불안과 결핍이 자리잡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이기경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은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미래를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미래를 대비하는 대신 당장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활동에 집중하게 될 수 있다”고 했다.
안정적 직장을 구하기 힘들고 미래 준비가 어려운 상황에서 현재에 안주하기 위해 쾌락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이들 소비 패턴을 보이는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고 지적한다. 우울감을 적절히 표현하거나 다스리지 못해 왜곡된 소비 행태를 보일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현실적 한계, 계속되는 경쟁 및 스트레스 때문에 현실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 등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과장은 “이런 상황을 단순히 일시적 현상이나 트렌드로 바라보지 말고 이면의 원인을 제대로 확인한 뒤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우울증, 소진증후군 등으로 판단 흐려져
우울증이 심해지면 사고나 행동, 판단력에 장애가 생긴다. 이때 과도한 소비를 하는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쾌락을 좇는 소비의 원인이 ‘번아웃신드롬’으로 불리는 소진증후군일 가능성도 있다. 소진증후군은 미국 정신분석 의사인 허버트 프로이덴버거가 처음 쓴 심리학 용어다.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에 빠져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소진증후군은 마음의 에너지가 다 방전된 상태다.
소진증후군이 찾아오면 일에 대한 의욕이 떨어진다. 일을 하기 위해 동기부여를 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성취감도 떨어진다. 노력해서 목표를 달성해도 좀처럼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처음 일할 때 가졌던 열정이나 의욕이 사라지고 주변 사람들과 논쟁이나 갈등에 자주 휩싸일 수 있다.
공감능력도 줄어든다. 공감은 남을 위로하고 내가 남에게 위로받는 능력이다. 스스로 지쳤을 때 누군가에게 따뜻한 감성 에너지를 받아 충전해야 한다. 소진증후군에 빠지면 이를 잘 할 수 없게 된다. 직장 상사의 요구에, 마감 시한에 맞추기 위해 맡은 일은 하지만 정서적으로 지친 상태가 계속되면 소진증후군을 의심할 수 있다.
퇴근할 때 방전됐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지쳐 있고 아침에 출근을 생각하면 피로가 몰려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짜증, 불안이 늘고 일하는 것에 심적 부담과 긴장이 늘어나는 것도 소진증후군의 증상이다. 현대인의 뇌는 밀려오는 정보를 체득하기 위해 스트레스 시스템이 과도하게 활성화돼 있다. 충전 없이 스트레스 시스템이 계속 작동하면 에너지가 줄어 소진증후군이 찾아올 수 있다. 증상이 심해지면 감정적 보상을 위해 보다 자극적인 쾌락을 찾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이 과장은 “소소한 소비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더 큰 만족을 위해 소비가 커질 수 있다”며 “소진증후군, 우울증 등 정신건강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뇌에 휴식 주는 단절훈련 해야
정서적으로 지친 상태라고 생각된다면 외부 정보와의 연결을 끊는 단절훈련이 도움 된다. 하루에 10분이라도 스스로 충전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 출근 후 컴퓨터가 켜지는 시간 동안 혹은 회의 시작 전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심호흡을 하고 호흡의 흐름을 느껴보는 것이 좋다.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며 잠깐 일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조용한 곳에서 밥을 음미하며 먹는 것도 도움 된다. 이때 음식의 색, 향, 밥알의 움직임을 느끼며 천천히 먹어본다. 하루 10분 정도 사색하며 걷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번아웃증후군을 피하는 방법이다. 여유롭게 몸의 움직임을 느끼면 뇌가 긴장을 풀고 스스로 생각을 돌아볼 수 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는 친한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도 좋다. 친구와의 수다가 어렵다면 슬픈 영화나 슬픈 작품을 보는 것도 도움 된다. 틈틈이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떠나는 것도 시도해볼 만하다. 기차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으면 명상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마음을 바라보는 힘이 생긴다.
운동 여행 등 자신만의 재충전 방법을 만들어 꾸준히 시간을 써야 한다. 무기력감이 심해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있으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전문의 상담을 받고 약물치료를 받는 것도 좋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도움말=대한의사협회, 이기경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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