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멀고도 아득한…고요함이 만들어낸 푸르른 파도소리…나그네도 떠난 이도 그리워하는…고향의 섬, 영산도

입력 2017-07-23 15:55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3> 국립공원 명품 섬 신안 영산도




영산도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아득하다. 목포 항에서 직항이 없으니 흑산도까지 가서 또 한 번 배를 갈아타야 한다. 그래도 섬을 찾는 사람 은 갈수록 늘고 있다. 불편하지만 섬은 원형의 미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또 비할 데 없이 고요 한 까닭이다. 영산도에 발을 디디는 순간 나그네는 세상의 온 갖 소음에서 해방돼 적막에 빠져든다. 온 국토 가 공사판 같은 내륙의 소란함이나 자동차 소 음도 없고, 오로지 철썩이는 파도소리뿐이다. 다른 섬들과 달리 영산도는 입도객 수를 제한 하기 때문에 주말이나 성수기에도 붐비지 않고 한적한 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영산도에는 주민들이 운영하는 마을 식당과 펜 션 등이 있는데 영산도 입도와 숙식은 모두 예 약제로 운영된다. 섬에는 외부에서 해산물이 들어오는 것도 금지 다. 오로지 섬에서 생산되는 해산물만 판매한 다. 섬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 섬의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영산도는 한국 섬들의 미래다.


영산강의 유래는 영산도일까?

영산도는 느낌이 참 밝고 화사하다. 서남해 섬들이 대체로 잿빛인 데 비해 영산도 바다는 푸르고 투명하기 때문이다. 섬이 작으니 흑산도에서 건너온 집배원은 행낭도 없이 우편물 몇 개를 손에 들고 다니며 배달한다. 마을 앞바다에서는 노부부가 다시마를 가득 실은 거룻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노인이 힘겹게 노를 저어 거룻배를 해변에 댄다. 노부부는 거룻배를 뭍으로 끌어올리려 애쓰지만 두 노인의 힘만으로는 어림없다. 노인은 정자 그늘에 쉬고 있는 마을 사람을 부른다. 정자에 있던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 배를 함께 끌어준다. 상생의 공동체가 살아있다.

항간에는 나주 영산포나 영산강의 이름이 영산도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고려 말 삼별초 항쟁 이후 진도의 삼별초 왕국에 동조했던 섬 주민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킨 공도정책이 있었다. 이때 흑산도와 영산도 등의 주민들도 나주 땅 남포강(영산강)변에 수용되면서 영산현이 생겼는데 그 이름의 연원이 영산도라는 것이다. 물론 확실한 근거는 없다. 더 큰 섬인 흑산도를 놔두고 굳이 작은 섬 영산도에서 현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단정하기보다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과제다.


잃어버린 우리 고향의 원형

영산도는 지금 30여 가구가 살지만 1960년대에는 100여 가구 1000명이 넘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섬이다. 예전에는 액기미라는 작은 마을도 하나 더 있었으나 지금은 폐촌이 된 지 20년이 넘었고 큰 마을인 영산리 하나만 남았다. 액기미는 ‘뒷고을’이라고도 했는데 액이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액기미라 했다는 설이 있다. 옛날 액기미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서 재를 두 개씩이나 넘어 학교에 다녔다. 외딴 마을이 싫어 액기미 사람들은 큰 동네에 넘어와 살고 싶어 했다. 큰 동네 사는 이들을 정말 부러워했다. 큰 동네에 빈집이 나오면 바로 샀다. 촌에 산다고 액기미 아이들은 큰 마을 사는 친구들한테 무시도 당했다. 뭍에서 보면 다 같은 낙도일 뿐인데 작은 섬에서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마을 골목으로 들어서니 어느 집 마당에서 할머니 한 분이 참깨를 손질 중이다. “혼자 오셨소? 오메 심심해라.” 참깨 가지를 보니 아직 덜 익었다. 그럼에도 일찍 베어온 것은 씨앗을 노리는 쥐와 새들 때문이다. 할머니는 쭉정이는 버리고 알이 여문 참깨만 골라낸다. 참깨 한 알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비로소 알겠다. 담벼락 밑에는 뭍에서 택배로 온 복숭아 상자가 세 개나 쌓였다. 무슨 잔치라도 있는 걸까. “막둥이 딸이 큰맘 먹고 해 보냈는디 복숭아 세 상자가 오다가 다 썩어버렸소.” 섬에서는 나지 않는 복숭아, 어머니 드시라고 막내딸이 세 상자나 사서 보냈는데 운송 과정이 길어진 바람에 대부분 썩어버렸다. 어미는 상한 복숭아만큼이나 속이 상하셨다. “정신 빠진 놈들이제. 부쳤단 지가 보름이 넘었는데 이제사 당도했소. 그라니 견뎌나겄소. 세 상자나 다 썩어 버렸소.” 과일 하나도 제대로 맛보기 어려운 섬 살이의 불편. 할머니는 상한 복숭아들 사이에서 멀쩡한 복숭아를 찾아내 건네주신다. “깎아 잡수시오.” 몇 번을 사양하지만 할머니는 끝내 손에 쥐여 주신다. 미안하고 감사하다. 나그네들을 환대하는 것은 섬의 오래된 풍습이다. 늘 나누며 살아온 섬사람들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섬. 섬에는 이렇듯 잃어버린 우리 고향의 원형이 살아있다.

영산도 당집에는 처녀신 모시고 있어

마을길을 돌아 당산에 오른다. 석주대문, 문암귀운 등이 포함된 영산도 팔경 중 첫째가 당산찬송이다. 물론 팔경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근래에 만든 것이다. 요즈음은 어디나 다들 팔경이란 이름을 붙여서 홍보한다. 더러 십경이나 십이경도 있지만 대다수는 팔경이다.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방책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팔경일까. 대한팔경, 관동팔경 같은 팔경의 원조는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이다. 하필 팔경인 것은 주역의 8괘와 연관이 있다. 춘하추동 4계절에 명승지를 음양으로 두 개씩 배정해서 팔경으로 정한 것이다. 소상(瀟湘)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 양자강의 두 물줄기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를 말한다. 소상의 아름다운 풍경은 당나라 때 시인 두보를 비롯한 많은 시인이 노래해 왔다. 소상팔경의 전통이 하나의 미학으로 확립된 것은 북송 때 화가들이 소상팔경도를 그리면서부터다. 이후 동북아에서 소상팔경은 관념산수 시대 최고의 미학이 됐다. 영산팔경 또한 소상팔경에서 비롯됐다.


당산으로 오르는 계단 길 중턱에 영산도의 신전인 당집이 있다. 당집에는 당산 조모님, 당산 조부님, 소당애기씨, 별방 도련님, 도산신님, 김첨지영감님 등의 신들이 좌정해 있다. 예전에는 정월 초하루 당제를 지냈지만 당제의 맥이 끊긴 지 여러 해다. 외지인은 쉽게 오르는 당산이지만 정작 영산도 노인들은 올라보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다. 당산 신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여그 사람들은 당에 잘 안 올라가요. 무선 것 아니께. 귀경 온 사람들이나 가지. 깨끗한 사람들이나 가제. 부정한 사람들은 절대 안 올라가. 동네 큰집인디 함부로 들어가 쓰겄소. 주의 안 하고 함부로 드나들다 먼 해를 입을지 몰라.” “당산에 모신 신이 처녀 신이던데, 어떤 신인가요?” “애기씹(아가씨)디야. 한아부지(할아버지) 아니고?”

모형 배에 액운 싣고 떠나게 해

당집에는 당할아버지도 모시지만 신의 존영은 처녀신인 소당애기씨만 있다. 할머니는 정작 자신의 마을 신전인 당집에 어떤 신이 있는지도 잘 모르신다. 그만큼 두려운 곳이 당집이니 알려고 하지 않으셨던 게다. 평생 섬에 살았지만 당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당제를 모시는 것 또한 부정한 행위를 하지 않은 남자들뿐이라 더 그렇다. 섬 주민들의 전통 신에 대한 외경은 여전하다. 먼 바다 섬, 늘 사나운 파도와 태풍의 위협에 시달리니 더 그러할 것이다. 당산은 본래 초가였는데 낡아서 주저앉아버리자 서울 향우회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해 줬다. 영산도 당은 흑산도 최고 당인 진리 당의 분당이다. 진리 당에서 처녀 신을 모셔다 건립했다. 영산도 당의 소당애기씨가 흑산도 진리 당의 그 영험하다는 처녀 신인 것이다. 옛날에는 이 작은 섬에서 3년에 한 번씩은 꼭 소까지 잡아서 바치며 당제를 지냈을 정도로 당은 절대적인 신앙의 성지였다.


2박3일 동안 제관들이 당에서 제를 지내고 내려오면 뱃머리에서는 용왕제를 지냈다. 이때는 모든 집이 각각 정성껏 상을 차려 와 제를 올렸다. “권고(군고)를 치고 다녔어요. 집집마다. 배 만들어 지푸라기로 아저씨 만들어 허사비 배에 태워서 띄우고 그랬어요.” 서남해 섬 지방에서는 풍물을 치는 것을 군고라 한다. 수군 진이 있던 옛날 군사 음악으로 쓰이던 풍물 전통이 군고로 이어진 것이다. 용왕제 때는 나무로 모형 배를 만들고 거기 허수아비까지 태워서 먼 바다로 보냈다. 액운을 다 싣고 떠나달라고. 사람들은 모형 배에 돈도 찔러 넣고 소원도 빌었다. 모형 배는 진짜 배에 싣고 가 먼 바다에 내려놓고 띄워 보냈는데 이때 모형 배가 눈에서 안 보일 때까지 안 엎어지고 잘 가 주면 마을이 길할 징조고 띄우자마자 바로 엎어져버리면 마을에 액운이 낄 징조라고 여겼다. 어떤 해에는 그 모형 배가 멀리 태도나 만재도까지도 흘러가 그 섬 사람들이 줍기도 했다 한다. 위도 띠뱃놀이와 거의 비슷한 풍습이다.

예전에는 홍어잡이 요즘은 멸치


옛날에는 영산도에서도 돛을 세 개나 단 큰 중선을 이용해 홍어잡이를 했다. 주로 태도 서바다와 홍도 뒤쪽 바다에 가서 많이 잡아오곤 했다. 조기는 영산도 뒤편으로 더 멀리 나가 잡았다. 또 한때는 주머니처럼 생긴 그물인 낭장망으로는 멸치를 잡았다. 돌미역, 돌톳, 돌김 등 해초도 채취했다. 요새는 바다도 가뭄이 들어 어느 순간부터 생선도 잘 안 잡히고 해초류도 예전 같지 못하다. 기후 변화와 환경오염, 어업기술 발전이 가져온 남획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해 바다의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할 것이 없습니다.” 한동안 젊은 사람들이 생선을 기르는 가두리 양식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태풍 한 방에 끝나고 말았다. 요새는 바다에 뿌려서 키우는 전복 양식만 한다. “여기 태풍이 엄청 세게 답니다. 마을이 다 망해버렸죠. 가두리 하다가. 다 그만둬버렸죠. 다들 여그 떠서 도시로 나갔습니다.” 다시 젊은 사람 몇몇이 들어와 살고 국립공원 명품 섬으로 알려지면서 관광객도 제법 찾는 섬이 됐지만 여전히 섬은 노인들이 태반이다. 태풍이 직접 닿는 섬이다 보니 농사도 쉽지 않다. 그래도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살면 섬은 평화롭고 안온하다.


영산도가 명품마을로 유명세를 타고 식당과 숙박 시설이 들어선 뒤 좋아하는 이들은 관광객뿐만이 아니다. 고향 떠나 살던 사람들이 더 기뻐한다. 출향했던 노인들도 많이들 다녀갔다. 37년 만에 고향을 찾아왔다가 울고 간 노인도 있었다. 먹고 잘 데가 생겨서 고향에 오기 쉬워졌다고 모두 좋아한다. 다시는 발을 못 디딜 줄 알았는데 찾아왔다고 감격스러워했다. 1년에 한 번씩이라도 꼭 다녀가겠다고 다짐을 하고 갔다. 여행자들도 고향 같은 정을 느끼고 가는 섬. 섬사람들의 고향이 이제는 모든 육지 사람의 고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섬이야말로 이 시대 마지막 고향이다.


▶영산도 탐방 예약은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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