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보라 기자 ] 평양냉면계의 노포(老鋪)로 꼽히는 서울 마포구 을밀대. 이곳은 나이 지긋한 단골이나 근처 직장인이 즐겨찾는 집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풍경이 달라졌다. 주말이면 20대들이 긴 줄을 선다. 홀 전체의 50% 이상이 젊은 연인으로 채워지는 일도 다반사다. 다른 평양냉면집도 마찬가지다. 을지면옥, 평양면옥, 필동면옥 등에도 요즘 20~30대 손님이 가득하다. ‘무미(無味)의 음식’ ‘실향민의 음식’이었던 평양냉면이 자신만의 개성과 취향을 좇는 젊은 ‘힙스터’들의 음식이 되고 있다.
실향민의 음식에서 ‘힙스터’의 음식으로
평양냉면은 좋게 말하면 마니아의 음식, 나쁘게 말하면 비주류 음식이었다. 똑같이 이북에서 온 냉면이지만 함흥식 냉면은 새콤달콤하고 칼칼한 맛으로 넓은 소비층을 확보한 지 오래다. 여세를 몰아 함흥냉면은 인스턴트 냉면으로까지 진화했다. 함흥냉면이 진화하는 동안 평양냉면의 소비층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6·25전쟁을 전후로 월남한 서북 출신들이 수십 년 전 시작한 오래된 가게들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을밀대, 평양면옥, 필동면옥, 을지면옥, 우래옥 등이 다 그런 가게였다. 심심하고 아무런 맛이 안 나는 데다 높은 가격 때문에 ‘어르신의 음식’으로 통했다.
밍밍한 평양냉면은 2010년 이후 소비층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젊은 층이 새로운 소비자로 등장했다. ‘최소한 세 번, 열 번 먹으면 마니아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맛집·미식 프로그램이다. 맛집 프로그램은 최근 5, 6년 새 급격히 늘었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음식평론가 등 미식가들이 평양냉면에 대해 1~2시간씩 맛과 역사 등을 평가하는 장면이 자주 방송됐다. 국내에서 미식가 대접을 받으려면 ‘맵고 달고 신’ 함흥냉면이 아니라 평양냉면을 제대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無味를 즐긴다는 정서적 우월감도 한몫
평양냉면의 스토리도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실향민이 연 가게를 2대, 3대째 운영하는 이야기가 전파됐다. 평양면옥계 라이벌인 의정부파와 장충동파의 이야기도 뒤늦게 알려졌다. 의정부파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수한 의정부 평양면옥과 첫째 딸이 운영하는 필동면옥, 둘째 딸이 운영하는 을지면옥, 셋째 딸이 운영하는 본가필동면옥 등을 말한다. 장충동파는 어머니와 큰아들이 장충동 평양면옥을 운영하다가 이후 둘째 아들이 논현동 평양면옥, 딸은 분당 평양면옥, 큰아들의 사위는 도곡동 평양면옥을 내며 형성됐다. 이런 이야기들이 전해지며 관심이 높아졌다.
여기에 ‘무미(無味)’를 내기 위해 각 냉면집이 육수를 꼬박 하루 이상 끓이고, 집집마다 메밀 함량과 면의 탄력, 고명까지 모두 다르다는 것 등이 알려지면서 ‘평냉 투어’까지 생겨났다. 마니아층은 이 과정을 통해 두터워졌다.
이런 특징은 젊은 세대의 성향과 맞아떨어졌다. ‘힙스터’는 1940년대 미국에서 만들어진 속어다. 유행 등 대중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취향과 개성을 좇는 부류. 일반 대중과 자신을 구분하며 지적 우월감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한국의 20대를 사로잡은 힙스터 문화가 음식까지 번지는 과정에서 이들은 평양냉면이라는 메뉴를 찾아냈다.
평양냉면 마니아로 전문 블로그를 운영하는 김기석 씨(28)는 “평양냉면은 맛과 만드는 과정 등 이야기가 많아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며 “사진만 보고 어느 집 냉면인지 맞히거나,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맛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는 것도 평양냉면을 즐기는 재미”라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새 평양냉면을 좋아해야만 미각이 발달한 사람인 것처럼 여겨지는 유행도 있다”며 “진짜 맛있다고 느끼지 않으면서 그냥 그 집에 줄을 서는 것 자체로 ‘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다”고 말했다.
평양냉면 신흥 강자들로 ‘세대교체’ 중
이처럼 평양냉면이 인기를 끌면서 전문 식당도 크게 늘었다. 최근 개업한 서울과 수도권 일대 냉면집은 이미 마니아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노포들이 강북에서 시작했다면, 새내기 평양냉면집은 강남에 둥지를 튼 곳이 많다. 경기 성남시 분당의 ‘능라도’ 본점은 신흥 평양냉면집 중 가장 유명하다. 메밀향과 육향이 강하고 면의 탄력과 굵기도 적당해 단숨에 신흥 강자로 떠올랐고 강남에 분점도 열었다. 서울 청담동 ‘피양옥’은 소·돼지·닭으로 낸 육수의 감칠맛으로 소문났다. 논현동 ‘진미평양냉면’도 평양면옥의 20년 된 장인이 독립해 연 곳으로 기본에 충실하다.
강북권에는 평양 옥류관 출신 요리사가 문을 연 ‘동무밥상’, 양대창으로 유명한 ‘청춘구락부’의 메밀 100% 순면 평양냉면 등이 마니아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유명 셰프들도 가세했다. 한식 파인다이닝 ‘정식당’으로 미슐랭 스타 셰프가 된 임정식 셰프는 ‘평양냉면 팝업스토어’를 운영 중이다. ‘몽로’의 박찬일 셰프는 올해 새로 문을 연 ‘광화문국밥’에서 평양냉면을 선보이고 있다.
■ 노포(老鋪) 넘보는 평양냉면 '8대' 신흥 강자
‘능라도’ 분당 본점
●평양냉면 신흥강자로 자리잡은 곳. 메밀향과 육향의 균형이 좋다.
●평양냉면 1만1000원, 접시만두 1만1000원, 만둣국 1만1000원, 온반 1만1000원, 불고기 3만원, 어복쟁반 6만·10만원
●경기 성남시 분당구 산운로32번길 12 (031)781-3989
청담동 ‘피양옥’
●소·돼지·닭으로 만든 맑은 육수가 깊은 맛을 낸다. 10여 종류의 고기로 만든 어복쟁반도 유명하다.
●물냉면 1만1000원, 비빔냉면 1만1000원, 동치미냉면 1만1000원, 만두 1만1000원, 만둣국 1만1000원, 녹두전 8000원, 어복쟁반 6만·9만원
●서울 강남구 삼성로133길 14 (02)545-9311
논현동 ‘진미평양냉면’
●평양면옥 20년 장인이 독립해 만든 기본에 충실한 평양냉면
●냉면·비빔면·만둣국·접시만두 각각 1만원, 편육(소고기) 2만5000원, 제육 2만4000원, 불고기 2만3000원, 어복쟁반 5만·8만원
●서울 강남구 학동로 305-3 (02)515-3469
마포 용강동 ‘청춘구락부’
●꿩과 한우를 우려 만든 육수와 100% 메밀 순면의 조화가 좋다. 들기름 메밀순면도 별미다.
●평양냉면·평양 비빔냉면·들기름 메밀순면 각 1만1000원, 특양냉면 1만3000원
●서울 마포구 토정로 308 (02)702-1399
여의도 ‘정인면옥’
●여의도 직장인들의 ‘냉면앓이’를 달래는 곳. 깔끔한 한우 육수를 쓴다.
●평양냉면(물·비빔) 9000원, 순면(물·비빔) 1만원, 만둣국 9000원, 암퇘지 편육 2만원, 접시만두 9000원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76길 10 (02)2683-2615
공덕동 ‘무삼면옥’
●조미료, 설탕, 색소 등 3가지가 없는 자연주의 냉면. 표고버섯향이 진하다.
●100% 메밀냉면(보통 기준) 1만1000원, 50% 메밀 냉면은 9000원
●서울 마포구 마포대로12길 50
합정동 ‘동무밥상’
●평양 옥류관 출신 요리사가 내는 담백한 맛. 온면으로 나오는 오리국수도 인기다.
●북한냉면 9000원, 오리국수(온면) 8000원, 평양만둣국 8000원, 평양찐만두 8000원, 오리국밥 8000원
●서울 마포구 양화진길 10 (02)322-6632
정동 ‘광화문국밥’
●박찬일 셰프가 운영하는 돼지국밥집. 계란 지단 고명이 수북이 올라간 평양냉면도 깔끔한 맛을 낸다.
●평양냉면 9500원, 순면(메밀 90% 이상) 1만1000원, 돼지국밥 8000원, 수육 2만3000원, 저염명란오이무침 1만원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21길 53 (02)738-568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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