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그레이엄 벨이 아니라 안토니오 무치였다. 그는 벨보다 20여 년 앞선 1854년에 전화기를 완성했다. 작업 중 침실에서 치료 중인 부인과 대화하기 위해 고안한 ‘텔레트로폰(teletrophone)’이었다. 그러나 특허비용이 없어 1871년에야 임시특허를 얻고 매년 10달러씩 갱신료를 냈다. 그나마 몇 년밖에 못 냈다. 영구특허를 얻기 위해서는 250달러가 필요했다.
그는 1876년 벨이 전화기 특허를 등록하자 소송을 제기했으나 승소 직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100년 이상 전화기 발명자는 벨로 알려졌다. 2002년에야 미국 의회의 조사 결과 무치가 최초 발명자로 인정됐다. 의회는 “그에게 단돈 10달러만 있었다면 전화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했다.
발명사의 이면에는 이런 사연이 많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최고 업적으로 꼽히는 전구도 그렇다. 백열전구는 1835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보먼 린제이가 먼저 선보였다. 1875년 영국 화학자 조지프 스완이 개량 백열등 특허를 신청하자 에디슨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며 고소했다가 패소했다. 그는 스완을 회유해 합작사 ‘에디스완’을 차리고 수익을 나눴다. 몇 년 후 그는 “전구 속 탄소 필라멘트는 내가 발명했다”는 주장으로 상업성을 인정받았다.
에디슨의 빛에 가린 사람 중에 니콜라 테슬라가 있다. 교류전동기를 발명한 그는 에디슨 탓에 손해를 많이 봤다.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전기를 싼값에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내면 큰돈을 주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직류방식을 고집한 에디슨은 교류 전기의자를 사형 집행에 쓰게 하는 등 교묘하게 방해했다. 이 과정에서 테슬라는 교류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자신의 특허권을 포기했다. 이럴 때 에디슨은 특허 전문가들을 옆에 두고 있다가 재빨리 등록했다.
비행기는 라이트 형제가 고안했다지만, 원저작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있다. 다빈치가 특허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라이트 형제는 경쟁자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과학자와 싸웠고, 이때부터 특허분쟁이 일반에 알려졌다. 현대에 와서는 무형자산인 소프트웨어 분야로 특허 싸움이 번지고 있다. 아무리 기발한 것을 발명해도 특허를 받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도 아메리고 베스푸치에게 ‘아메리카’ 이름을 넘겨준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애플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 삼성 등 굴지의 첨단기업들이 특허소송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직원 2500여 명의 서울반도체가 발광다이오드(LED) 부문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것도 1만 개가 넘는 특허 기술 덕분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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