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근호 기자 ] 1965년 10월14일 한국인 13가구 78명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항에 내렸다. 아르헨티나 한인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었다. 한국을 찾은 장영철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50년사 편찬위원장(사진)은 인터뷰에서 “초기 이민자들은 물질적으론 가진 게 거의 없었지만 ‘동포애’라는 값진 무형의 자산이 있었다”며 “섬유 관련 업종에 종사하다 온 몇몇 분이 ‘같이 먹고살자’며 편물(뜨개질)을 가르쳐 준 덕분에 지금은 한인 동포들이 아르헨티나 의류산업을 꽉 잡고 있다”고 말했다.
1992년 아르헨티나로 이민가 현지에서 기자 생활을 한 장 위원장은 올초 640쪽 분량의 《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50년사》를 펴냈다. 원래 이민 50주년이 되는 해인 2015년에 책을 낼 계획이었지만 초기 이민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컬러 인쇄에 맞게 편집을 바꾸면서 발간이 늦어졌다.
초기 이민자들은 아르헨티나 라마르께 지역에 400 규모의 땅을 무상 임대받았다. 변변한 농기구조차 없던 그들은 고군분투하다 결국 도시 노동자로 흘러들었다. “초기 이민자 중에 지금은 호주에 사는 조화숙이란 분이 있어요. 편물을 짜는 능력이 있어 이를 한인 여성에게 가르쳤습니다. 여성들이 집에서 편물을 짜며 벌어들인 돈이 하루에 1달러50센트 정도였는데 과거 농장 생활할 때 10시간 일하고 1달러 벌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수입이었죠.” 초기 이민자 최영덕 씨는 남자들에게 편직을 알려주면서 섬유업이 아르헨티나 한인의 주업종으로 자리잡았다.
장 위원장은 “지금도 아르헨티나 동포 3만여 명 가운데 70% 이상이 의류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했다. 단추나 지퍼, 봉제는 물론이고 한인이 경영하는 유명 의류 브랜드 업체도 탄생했다. 수영복에선 ‘노다지’ ‘솔레아노’, 청바지는 ‘나하나’, 여성복은 ‘까라멜로’ 같은 브랜드다.
1950년생으로 칠순을 바라보는 그는 “이민 50년사를 통해 후세대에 동포애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낯선 땅에서 한인들이 역경을 딛고 성공할 수 있었던 힘은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르헨티나 한인 사회의 자랑거리고, 후세대에도 정신적 자산으로 계속 남아있기를 바랍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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