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한 폴란드의 도전은 어디로 튈까
김흥종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유럽특임파견관 >
한여름의 브뤼셀은 한산했다. 관광객으로 가득 찬 구시가지와 달리 유럽연합(EU)집행위원회가 자리하고 있는 유럽쿼터는 긴 여름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게으른 햇살이 텅 빈 거리를 비추는 가운데 바삐 걷고 있는 넥타이 정장 차림 직장인들과 길을 잘못 들어 두리번거리는 관광객들만 간간이 보일 뿐이다. 지난달 26일 비공개로 열린 EU·동아시아 라운드테이블 경제세미나는 이렇게 평온한 바깥 일상과 달리 열띤 토론과 긴장감 속에서 진행됐다.
가장 중요한 이슈는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는 세계교역질서를 어떻게 새로 정립하는가의 문제였다. △낮은 수준의 도하개발아젠다(DDA) 타결을 통해 다자주의로 복귀 △양자 자유무역협정(FTA)의 중단 없는 추진과 다자화 △이슈별 메가 FTA 추진 △투자협정 활성화 △아셈(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같은 지역 간 협의체 활용 등 많은 방안이 나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최근 여러 나라에서 힘을 얻고 있는 신보호주의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였다. 대외개방과 자유무역은 지난 몇십 년 동안 적어도 다자무역체제 안에서는 도전받지 않는 보편적 가치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보편적 가치가 흔들리는 시점에서 작금의 혼란을 극복하려는 여러 방안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자국 이기주의의 근시안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어떤 논의도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배경을 놓고 본다면 그 누구보다도 EU는 더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다. EU라는 존재 자체가 개방적 지역주의를 대표하고 있으며, 국가주의를 넘어선 초국가주의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같이 회원국이 걸어오는 거친 몸싸움을 이겨내야 하고 외부적으로는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세력의 위협에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다.
EU의 통상정책도 개별 회원국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공동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으며, 나아가 개방적 교역질서를 유지함으로써 비회원국과의 공존공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EU가 한·EU FTA를 양자 간 기본협정이라는 토대 위에 하나의 통상분야 기둥으로 이해하는 것도 통상정책의 철학적 근간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베트남, 싱가포르, 그리고 협상이 막 끝난 EU·일본 FTA에서도 같은 기조를 찾아볼 수 있다.
논의를 경제통상에서 더 넓혀보면 도전은 더욱 거세다. EU는 회원국 확대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보편적 가치의 확산이라고 주장해왔다. 가장 중요한 가입 기준은 유럽이 그동안 피 흘리며 발전시켜왔다고 주장하는 보편적 가치, 즉 민주주의와 인권, 법치며 이를 과거 공산권 전체주의 국가들에 이식시켜 평화와 번영을 확산한다는 것이다. 이 여름에 폴란드에서 전개되는 행정부의 사법부 장악 시도는 유럽적 가치인 법치주의의 근간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고 EU는 경고했다. 사법부 개혁이 아무리 수긍할 만하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사법부의 인사권을 행사한다면 법치가 아니라 인치가 될 것이라는 게 EU의 판단이다. EU와 폴란드가 삼권분립을 두고 대립하고 있다면, 헝가리 대통령과 조지 소로스의 대결은 칼 포퍼에게서 감명받아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소로스와 그가 열린 사회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헝가리 대통령 간의 가치 전쟁에 다름 아니다. 신규회원국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이 두 나라의 최근 행보는 안 그래도 브렉시트로 휘청거리고 있는 EU에는 내부에서 타오르는 유럽적 가치에 대한 도전이다.
가치의 혼란에 대한 명백한 해답은 아직 없다. “위기는 예전 것이 사라져가지만 새로운 것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가운데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빌린다면 지금이 EU의 위기다.
김흥종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유럽특임파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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