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재래돼지는 체질이 강건하고 번식력이 강하다. 체격은 왜소하다. 또한 성숙이 늦고 비만성이 결핍하여 경제가치돈 중 최열등하여 이를 개량하는 것이 극히 긴요하다.”(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성적요람, 1927년)
돼지의 종류는 다양하다. 세계적으로 100여 품종이 있다. 그 중 상업적으로 사육되는 것은 약 30종. 우리나라에선 주로 흰색의 랜드레이스종과 요크셔종을 교배한 잡종 돼지가 사육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해외에서 육성된 품종이다.
한국에는 흑돼지라고 불리는 검은색 재래돼지가 있었다. 주로 만주지역에서 서식하던 흑돼지가 고구려 시대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고려·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초반까지안 재래돼지는 한국인의 식탁위에 올랐다. 1920년대 발간된 조선 농업편람에 “재래돼지의 육미는 조선 사람들의 입맛에 적합한 것 같다”고 쓰여있다.
그러나 1920년대 말부터 조선총독부가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재래돼지를 개량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조선총독부는 외래종인 버크셔 종을 들여와 재래돼지와 교배시켰다. 85~90kg까지만 자라는 기존의 재래돼지 대신 100kg이 넘게 자라는 새로운 품종의 흑돼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흰색 돼지인 요크셔종이 대거 도입되면서 재래돼지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이후 한국 양돈시장은 백색 돼지가 장악했다.
1996년 농촌진흥청이 전국 재래돼지 사육두수를 조사한 결과 2218농가에서 6만1968마리를 키우고 있다는 응답이 나왔다. 그러나 이중 실제로 재래돼지의 고유한 DNA를 갖고 있는 것은 드물었다. 대부분 색은 검지만 외래종과 교배한 잡종 후손인 흑돼지였다.
재래돼지는 사라진 것일까. 이 질문에 “아직은 아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다. 경북 포항에서 돼지를 키우는 이한보름 송학농장 대표(39)다. 그는 지난달 재래돼지로 만든 요리를 선보이는 팝업레스토랑을 서울에서 열었다. 재래돼지를 일반 소비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는 “송학농장은 민간에 유일하게 남은 재래돼지 사육 농장”이라고 소개했다.
◆아버지의 호기심에서 출발한 재래돼지 사육
1988년 국내에 재래돼지 바람이 불었다. 우리의 것이 좋다는 신토불이 운동이 본격화된 시점이다. 농촌진흥청은 고유의 돼지 품종을 복원하기 위해 자료 조사를 시작했고 농장들도 이에 부응해 재래돼지 사육을 시도했다.
송학농장은 1992년부터 재래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제주, 남원, 고성, 지례 등 흑돼지로 유명한 전국 산지에서 흑돼지를 사들였다. 당시 농장은 이 대표의 아버지인 이석태 씨가 이끌고 있었다. 이한보름 대표는 “우리 고유의 품종이 있다는 사실에 아버지가 상당한 호기심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석태 씨는 한때 가톨릭농민회에서 토종 농산물 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이 씨는 당시 토종 복원 운동이 진행되고 있던 재래돼지와 칡소 중 어떤 것을 키울까 고민했다고 한다. 송학농장도 당시 다른 축산농장들과 마찬가지로 돼지와 소를 함께 키웠을 때다. 이 씨는 결국 칡소를 뒤로 하고 재래돼지를 선택했다. “돼지가 소에 비해 빨리 자라니까 생산성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는 게 아들 이 대표의 설명이다.
이석태 씨는 문헌에 나온 재래돼지의 외형인 ‘털이 검고, 코가 길며, 안면 주름이 있고, 턱이 곧은' 특징에 따라 전국에서 사온 흑돼지를 분류했다.이 씨는 교배 체계를 만들어 5세대 동안 털 색깔이 다르거나 재래돼지의 특성에서 벗어나는 후대를 제외하며 한국 재래돼지의 외형적 특징을 가지는 집단을 만들었다. 유전자 추적을 통한 육종을 연구하던 여정수 영남대 교수와 함께 재래돼지의 고유한 유전형질 8개도 발굴했다. 이런 지난한 작업 끝에 재래돼지 복원에 성공했다. 이석태 씨는 이 공로로 2003년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축산 기업인이 아닌 축산 농민에 가까운 사람이 산업훈장을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유전학적으로 발전시킨 아들
아들인 이한보름 대표는 축산업이 싫었다. 더운 여름, 냄새나는 축사에서 갇혀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해외로 나가고 싶었다. 대학과 대학원을 해외에서 나온 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냥 그곳에서 정착하고 싶었다.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도 만만치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국에 남기로 결심하니 아버지의 돼지농장이 가장 먼저 보였습니다. 그래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영남대 동물생명과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그는 재래돼지를 외래종이나 외래종과 혼합된 흑돼지와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유전학적 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영남대 연구팀에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DNA를 분석하면 우리 고유의 돼지에는 해외종인 버크셔, 요크셔, 랜드레이스 등에는 나타나지 않는 염기 서열이 나타납니다. 이를 바탕으로 외형적으로 비슷한 재래돼지 중에서도 같은 DNA를 갖고 있는 집단을 분류해냈습니다.”
이렇게 분류한 돼지가 1920년대에 있었던 그 재래돼지일까. 이한보름 대표에게 묻자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당시의 기록이라고는 돼지의 외형에 대해 설명한 몇 줄의 보고서 뿐이어서 그 돼지의 DNA를 확인해볼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다만 당시의 기록을 바탕으로 재래돼지라고 불리는 것에 최대한 근접한 돼지를 복원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에요. 그걸 DNA 기법으로 다시 확인한 것이고요.”
이한보름 대표는 2007년 재래돼지 DNA 분석과 관련된 특허를 냈다. 재래돼지를 DNA로 분류하는 기술에선 그가 가장 전문가라는 뜻이라고 봐도 된다는 의미다. 아버지인 이석태 씨는 이듬해 농장을 완전히 아들에게 물려준다.
◆효율성의 시대와 맞지 않는 재래돼지
재래돼지 복원에 성공한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고유의 품종을 확보해 식품 다양성을 확대한 것은 미래 식량 주권 문제나, 급격한 기후 변화와 유행성 질병 창궐 사태 등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의미있는 일이라도 소비자들이 이 돼지에서 나온 고기를 소비하지 않으면 산업적으로 생존하기 어렵다. 이석태 씨와 이한보름 대표는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99년 재래돼지의 고유한 유전자를 처음으로 확인한 후 송학농장이 '노적봉 가든'이라는 프랜차이즈 사업을 진행한 것도 소비 확대를 통해 산업을 키우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고깃집은 상당히 잘됐습니다. 재래돼지는 일반 돼지보다 쫄깃한 맛이 나요. 고기도 맛있었고, 소비자들도 재래돼지를 복원했다는 것에 흥미를 가졌어요. 노적봉 가든 점포는 한 때 10개까지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정작 송학농장은 적자가 쌓여갔다. 이 대표는 “당시 일반 돼지고기에 비해 20%가량 비싼 값을 받았지만 원가 이하 였다”고 말했다.
비싸게 팔았음에도 적자가 났던 건 재래돼지가 일반 돼지보다 더디게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돼지고기를 제공하는 YDL(요크셔, 듀록, 랜드레이스의 삼원교잡종) 품종은 6개월간 키우면 100~115kg까지 크는 반면 재래돼지는 10개월을 키워도 85kg에 불과하다. 이한보름 대표는 “키우는 기간을 고려하면 고기가 절반밖에 안 나온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산술적으로는 두 배 이상의 가격을 받아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소비자들이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식당 주인들이 이를 거절했다. 재래돼지를 파는 노적봉 가든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재래돼지가 생산성이 낮다는 조선총독부의 지적은 2000년대에도 유효했다. “10년간 버티다가 2009년에 결국은 손을 들었습니다. 참담한 기분이었습니다.”
◆포기의 기로에서
이 대표는 노적봉 가든 폐점과 함께 재래돼지 사육을 그만두려고 했다. 누적된 적자를 견디기 어려웠다. 한때 4000마리를 키웠던 재래돼지를 더 이상 키우지 않고 그는 남들처럼 흰 돼지를 6개월만에 키워 파는 일반 양돈인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2006년 재래돼지협회가 출범할 정도로 세를 넓혔던 재래돼지 농가들도 하나 둘 씩 사업을 접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때 현업에서 떠났던 아버지 이석태 씨가 이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 “TV를 보니까 취미로 애완견 100마리 씩 키우는 사람도 나오더라. 재래돼지 그거 보존하면서 취미삼아 해보면 어떻겠냐?”
이 대표도 아버지와 자신이 십 수년 간 키우며 복원한 재래돼지를 그냥 포기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바꿨다. 재래돼지를 팔 생각을 하지 않고 연구만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딱 300마리만 연구목적으로 남겨놓기로 했다.
“저희 농장이 4000두 규모거든요. 그중 대부분은 일반 양돈을 하되 일부를 보존하며 연구는 계속 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어요. 말하자면 일반 돼지를 키워 번 돈으로 재래돼지 연구를 계속 하는 셈이죠.”
이후 7~8년간 그는 재래돼지를 고기로 팔지 않았다. 연구만 했다. 집단의 특수성을 어떻게하면 더 잘 확인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육질에 대한 분석도 계속했다. 경북도립대 겸임교수로 출강하며 재래돼지에 대해 강의도 했다. 올해부터는 도비를 지원받아 경북축산기술연구소, 단국대 연구팀과 함께 경북형 재래돼지의 산업화 연구를 시작했다.
“저희와 함께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재래돼지 농가가 작년에 폐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송학농장이 그만 두면 대한민국에서 재래돼지를 연구하는 농가가 아예 없어지는 거에요.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재래돼지가 농촌진흥청 등 연구기관에만 남아있는, 우리 삶과 거리가 먼 돼지로 남아있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소비의 가능성, 소비자들이 재래돼지의 가치에 지갑을 열까?
소비의 가능성이 엿보인 것은 올해 초다.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 있는 성우농장 이도헌 대표가 이한보름 대표에게 연락을 했다. 이도헌 대표는 일반적인 양돈 대신 다양한 품종의 돼지를 들여와 방목장에서 자유로운 양돈을 하는 축산인이다. 그는 이한보름 대표에게 “재래돼지를 분양 받아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재래돼지를 일반 소비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재래돼지를 들여와 자신의 농장이 아닌 마을에서 운영하는 방목장에서 키우고 이를 활용한 코스요리를 선보이는 아이디어가 이도헌 대표의 구상이었다. 농민, 농촌 주민, 셰프, 도시민을 연결하는 사회적 소비라는 점을 내세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한보름 대표도 흔쾌히 동의했다. “값을 두 세배 받아도 소비자들이 그 가치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시대가 왔는지 궁금했어요. 양이 아니라 질과 가치로 승부하는 시대가 되면 재래돼지도 수익을 내면서 판매될 수 있거든요. 시험삼아 소비자들에게 재래돼지를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축산인의 협업으로 지난달 ’재래돼지 팝업 레스토랑‘이 개최됐다. 청강문화산업대 교수이자 전 이트리 셰프인 김욱성 교수가 요리한 재래돼지 코스요리를 70여명이 경험했다. 일반 돼지고기에 비해 쫄깃한 육질이 색다르다는 평가가 나왔다. 합정동에서 버크셔K 돼지국밥을 만드는 옥동식을 운영하는 옥동식 셰프도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고기가 정말 좋으면 고기만 넣고 우려내도 훌륭한 국물을 낼 수 있다”며 “재래돼지도 국물을 내기 좋은 품종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재래돼지 품종을 소개하고, 품종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식사 전엔 세미나를 진행했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와 이한보름 대표가 강연했다. 이한보름 대표는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이 같은 팝업 레스토랑 형태로 재래돼지 고기를 소비자들에게 알릴 계획이다. 그는 “소비자들이 재래돼지에 대해 알게 된 후에는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고급 식당 등에 매월 한 마리씩 정기적으로 재래돼지 고기를 공급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그는 재래돼지를 키우고 그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하는 이유 하나가 더 있다고 했다. 그는 “쇠락한 농촌을 살리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옛날에는 농민들이 농장 옆에 한 두 마리 씩 돼지를 키웠어요. 그 돼지로 쏠쏠한 부가 수입을 올렸죠. 그런데 기업형 축산이 시작되면서 돼지 값이 떨어졌어요. 키워봤자 돈이 안되니까 농민들도 돼지 사육을 포기했고요. 재래돼지의 가격이 오르면 이 같은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반 농가들이 휴경지 등에서 재래돼지를 키워 1년에 1500만원정도의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 귀농을 하거나 농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농촌에 다시 활기가 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에 기여하고 싶어요.”
FARM 강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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