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꾼 걸러내자" vs "다주택자가 죄인이냐"
말 한 번 잘못했다 원수 사이로
대출상환 압박 심한 줄 모르고 다주택자 비난 발언했다 갈등
3주째 얼굴 안 보고 대화 안 해
강남 산다고 부자냐
아버지가 전용 42㎡에 사시는데 '부동산 큰손 아들'이라 소문
동료들 달라진 시선 부담
[ 오형주 기자 ]
직장인들에게 내 집 마련은 일생일대의 숙제다. 한평생 번 돈의 상당 부분이 주택 구입에 쓰이다 보니 얼마나 좋은 아파트에 사는지가 재테크 성공 여부를 판가름 짓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사무실과 회식 자리에서는 종종 부동산 투자 성공담과 실패담이 회자된다. 이달 초 정부가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강도 부동산 대책을 내놓으면서 김과장, 이대리들 사이에 집값에 대한 이야기는 더 늘었다. 부동산에 울고 웃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8·2 대책 놓고 곳곳에서 말다툼
한 통신업체에 다니는 엄모씨(35)는 이달 초 직장동료 조모씨(34)와 술자리에서 크게 말다툼을 벌였다. 원래 자기 집이 있는 조씨가 3년 뒤 완공 예정인 아파트를 두 달 전 분양받아 ‘일시적 2주택자’가 된 것이 화근이었다. 정부의 ‘8·2 부동산 대책’으로 조씨가 분양받은 아파트가 있는 지역이 투기지역으로 묶이면서 가능한 담보대출 규모가 갑자기 쪼그라들면서 집값의 60%인 중도금을 전부 대출로 충당하려던 조씨의 계획이 어그러졌다. 조씨가 “중도금 대출은커녕 계약금마저 날릴 위기에 처했다”고 분개하자 엄씨가 “정부에서 융통성 있게 살길을 열어줬는데 왜 엄살이냐”고 하는 통에 말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엄씨는 “대책에 따르면 2년 내에 기존 주택을 처분하겠다는 확약서를 쓰면 예전처럼 60%까지 대출받을 수 있다”며 “집도 있는 사람이 60%나 빚을 추가로 내면서 새 아파트를 사려 했다는 것은 결국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투기에 나선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조씨는 “그런 확약서를 쓰면 새 아파트 입주 전까지 1년 이상 전·월세를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며 “정책을 갑자기 소급적용해 살고 있던 집을 처분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폭력”이라고 맞받았다. “정부가 빚내서 집 사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왜 안 들었나”는 엄씨의 말에 조씨가 “지금까지 여당을 지지했지만 배신감만 든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두 사람의 말싸움은 정치 영역까지 확대됐다.
민간 경비업체에 다니는 권모 과장(37)도 얼마 전 옆 부서의 이모 과장과 이번 부동산 대책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가 사이가 틀어져버렸다. 정부 발표가 TV에 중계되는 것을 지켜보던 권 과장이 불쑥 “이번 기회에 빚내서 아파트 사고파는 투기꾼들을 싹다 잡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과장은 전세와 은행 대출을 활용한 ‘갭투자’로 아파트 다섯 채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출이 많아 은행의 계속된 상환 압력에 어려움을 겪던 이 과장은 권 과장 말에 “주택 가격 상승이 공급 부족 때문인 것은 대학에서 경제학 원론만 배워도 알 만한 얘기”라고 되받아쳤다. 이들은 3주째 대화도 하지 않으면서 사무실 공기를 썰렁하게 만들고 있다.
“강남 산다고 다 부자는 아닌데…”
‘강남에 살면 부자’라는 인식 때문에 남모를 속앓이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차장(38)은 서울 강남에 30평형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평소 직장 동료와 후배들에게서 ‘한턱 쏘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럴 때마다 김 차장은 “실제로는 빈털터리야”라며 손을 내젓지만 주변에선 믿지 않는 눈치다. 오히려 “돈도 많으면서 짠돌이처럼 왜 그래”라는 대답이 돌아오기 십상이다.
스스로를 ‘강남 거지’라고 표현한 김 차장은 “정말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아무도 몰라줘 서운하다”며 “대출받아 어렵게 집을 구한 데다 자녀 교육비, 생활비 등을 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고 했다. “부동산 얘기가 나올 때마다 한 번씩 쳐다보며 ‘비싼 데 살아서 좋겠다’는 시선을 보내는 게 부담스러워요. 이번에 정부가 8·2 대책을 내놓으면서 집 문제가 또다시 회식의 주요 주제로 떠올라 불편한 게 이만저만 아니네요.”
“‘부동산 오지랖’에 지쳐요”
반면 ‘내 집 마련’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직장 문화에 불만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세종시의 한 중앙부처에서 일하는 이모 사무관(29)은 사무실에서 부동산 얘기만 흘러나오면 귀를 닫는다. 사무실 내 동료 공무원의 관심은 8·2 대책의 타깃이 된 세종시 아파트 신규 분양에 쏠려 있지만 그는 부동산엔 당장 관심이 없다. ‘부동산에 저당잡힌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는 철학을 가진 이 사무관은 주식과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크라우드 펀딩 등에 주로 투자하고 있다. 나머지 돈은 여행과 문화생활을 하는 데 쓴다.
이 사무관은 “아파트 분양을 아직 받지 않았다고 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걱정하고 경제 관념이 없는 사람 취급하는 풍조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분양 하나 받은 것 갖고 큰 벼슬을 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본의 아니게 ‘부동산 투기꾼’ 취급을 받는 것이 속상한 사람도 있다. 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에서 일하는 최모 매니저(31)는 얼마 전 회사 사람들로부터 ‘부동산 큰손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재건축을 하게 되면서 이주할 곳을 알아봐야 한다”는 얘기를 꺼낸 뒤부터다.
그가 얘기한 아파트가 ‘투기꾼이 노리는 서울 강남구 주요 재건축 단지’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는 사실이 퍼지면서 동료들의 눈길이 달라졌다. 최 매니저는 “실은 전용면적 42㎡(13평)에 불과한 낡은 집일 뿐인데 아버지가 이사를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30년 가까이 살고 있다”며 “8·2 대책이 나온 뒤 평소 교류가 없던 회사 동료들에게까지 투기꾼 소리를 들으니 정말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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