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불행과 비극에 함께 아파하는 사회

입력 2017-08-30 18:41  

기업인들을 누가 교도소 담장 위에 올려놨나
권력과 기업의 '갑을관계'가 시장경제 왜곡
'그들만의 수난' 아닌 '대한민국의 비극'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



‘오래된 숙제.’ 이낙연 국무총리가 문재인 정부 키워드인 ‘적폐 청산’의 대용(代用) 표현으로 제안한 말이다. “적폐 청산이라고 하면 공격적 느낌이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생각이 여권 내 일반 기류는 아닌 모양이다. 정부와 여당의 ‘적폐 청산 전투’는 갈수록 기세등등해지고 있다. ‘청산’을 넘어 ‘초토화’로 치닫고 있다는 탄식까지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뇌물 혐의 등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데 대해 여권 지도부가 보인 반응에서는 섬뜩함이 느껴진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선고 직후 “정경유착에 철퇴를 내린 판결로 국민이 만족할 것”이라고 하더니, 며칠 뒤 “최장 45년형 선고가 가능했는데, 솜방망이 판결이었다”는 더 야박한 말을 쏟아냈다. 이춘석 민주당 사무총장도 “그 정도 형량에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지, 강한 의혹을 가진다”고 했다.

단 며칠이라도 영어(囹圄)의 몸을 경험해 본 사람들에게 옥중생활은 ‘악몽’이다. 며칠 전 2년의 징역형을 마치고 출소한 한명숙 전 국무총리는 “정말 가혹한 고통이 있었다”고 했다. 1심 판결대로라면 이 부회장은 5년 동안이나 그런 세월을 보내야 한다. 개인적 호오(好惡)를 떠나서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받게 된 사람에게 일단 위로를 보내거나, 최소한 유감을 표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여당 지도자들이 “경위를 떠나 안타까운 일” 정도의 표현 도량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이 부회장이 재판정에 서게 될 때까지 발생한 일련의 상황에서 정치권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1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뇌물 혐의를 유죄로 판결하면서도 “대통령의 요구를 쉽사리 거절하거나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치인들이 잘 알 것이다. 기업인이 정치권력자의 심기와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국정시스템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야(與野)를 떠나 국정의 한 축(軸)을 맡아 온 정치 지도자들로서 남 일 지켜보듯 팔짱 낄 처지는 아닐 것이다.

이번 판결로 기업인들은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대통령에게 적극적·명시적으로 청탁을 하고 뇌물을 준 것은 아니지만, 묵시적으로 청탁한 사실은 인정된다”는 게 1심 판결의 요지다. “묵시적 청탁으로 엮으면 안 걸릴 기업이 있겠느냐”는 불안이 기업들을 덮쳤다. 어디부터가 ‘정책 협조’이고, 어디까지가 ‘정경유착’인지를 매번 판단해야 하는 날벼락을 맞았다. 최근 한국전력이 평창동계올림픽을 위해 800억원을 지원키로 한 결정이 훗날 ‘묵시적 청탁에 의한 것’으로 엮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혼란을 정치가 해결해줘야 한다. 해묵은 ‘정경유착’ 논란이 정치·행정 권력과 기업의 ‘갑을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여당 지도자로서 “삼성 재판 결과를 기업인들이 안심하고 본연의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반성과 다짐을 할 수는 없었을까,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재용 재판’은 한국을 넘어 국제 사회의 큰 이슈로 떠올랐다. 영국 BBC방송은 1심 재판 상황을 실시간 뉴스로 다뤘다. 세계 모바일 독자들에게 푸시 메시지까지 보냈다. 미국 CNN은 재판 상황을 생중계했고, 일본 아사히신문은 호외를 발행했다. 이 부회장이 최종적으로 어떤 사법적 판단을 받건, 1심 결과와 정부·여당 지도부의 야멸찬 삼성 몰아붙이기는 온 세상에 삽시간에 ‘기정사실’로 퍼져나갔다.

삼성이 한국 산업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떻다든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자들이 내심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 것이라든지 하는 얘기를 꺼낼 생각은 없다. 무엇이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을, 아니 한국의 기업들을 교도소 담장 위로 올려놓았는지에 대한 무겁고 진지한 성찰과 담론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답답하다. 삼성의 수난을 대한민국의 불행과 비극이라는 관점으로 보고 함께 아파할 때 ‘오래된 숙제’를 제대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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